“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다시 아들 바오로와 함께 성지순례를 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들 바오로의 축일을 하루 앞둔 6월 28일. 내 입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감사기도가 나왔다.
한동안 중단했던 순례 길에, 아들 바오로와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했다.
아들 바오로와 수원교구 구산 성지를 찾아 떠나는 내 마음은 천상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평화의 은혜가 가득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힌 거룩한 聖地(성지)라 그런지, 한옥마을을 연상케 하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성지였다.
자비의 문을 통과해 성당마당을 들어서니, 먼저 순교자 김성우 성인 및 순교가족의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측으론 마당을 둘러싼 십자가의 길이 인상적이었다.
성당 안에는 많은 분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미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바오로가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미사 지향으로 봉헌하고는 미사를 드렸다. 아들과 성지에서 드리는 미사가 정말 오래만이다. 한 1년 4개월 정도 된 것 같다.
미사를 집전하신 신부님은 순례 오신 분들의 미사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를 하셨다.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이 신앙에 입문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두 동생 만집, 문집과 함께 유방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동안 유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 촌으로 만들었고, 1836년에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성인은 1849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여 이듬해에 47세의 나리로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해 이곳 구산 성지에 모셔졌는데, 이곳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200여 년간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자 순교의 얼이 살아있는 곳이다.
미사를 봉헌 후 먼저 밖으로 나간 바오로를 찾아 마당을 지나 나오니, 다른 성모님에 비해 유달리 눈에 들어오고 특이한 성모상이 들어왔다. 아들은 그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모상은 구산 성지 초대 전담(1879-1884년) 고 길홍균(이냐시오) 신부의 꿈에 나타난 성모님을 김세중(프란치스코) 화백이 그대로 조각한 작품이라고 한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손에 지시봉을 들고 계신 특별한 모습의 성모님은 가정과 온 인류의 평화를 바라시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마리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하나밖에 없는 귀중하고 소중한 성모상이라고 했다.
순교자 묘소 앞에는 미사 때,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읽었던 ‘살아도 천주교인, 죽어서도 천주교인으로 죽고 싶다.’란 문구가 묘소 앞에 써져 있어서 마음이 더욱 겸손해졌다. 참된 순교자들의 영성을 현재 내가 처한 현실 일상사 안에서 땀의 순교를 하여야 함을 느꼈다. 목숨을 바쳐서 순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어떤 사명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즉 내가 맡은 사명에 충실하며, 특히 본당 신부님을 도와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여야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하며, 아들 바오로가 주님의 뜻을 따라 잘 걸어가도록 옆에서 묵묵히 기도하며 보살펴주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 마음과 염원을 담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동안, 아들 바오로는 성지 곳곳을 돌아보았다고 하였다. 생각보다 성지가 넓었다고 말하는 아들 바오로를 통해 하느님의 숨결이 느껴졌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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