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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에 순교한 권진이 아가타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6-26 11:08:20 조회수 : 44

권진이(1819~1840)는 순교자 한영이의 딸로, 서울의 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비신자였던 아버지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대세(代洗)를 받은 뒤 세상을 떠나며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교리를 배우고 딸과 함께 입교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갔습니다. 권진이는 열세 살에 한 교우와 혼인했습니다. 신랑 집안이 너무 가난해 신부를 집으로 데려올 수 없자, 신랑은 친척인 정하상 집에 권진이를 보내 살림을 맡겼습니다. 1833년, 정하상이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조선에 모셔오자, 권진이는 유 신부의 처소를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비록 혼인한 몸이었지만 권진이는 동정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권진이는 혼인식은 올렸으나 동거하지는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유 신부에게 전했고, 유 신부는 그 뜻을 존중해 혼인을 무효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교우들에게 와전되어, 유 신부와 권진이 사이에 ‘나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은 분노했고, 권진이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로 인해 권진이는 한때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 무렵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 주었습니다. 이후 권진이는 어머니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밤, 포졸들이 모녀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한 배교자가 밀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권진이의 미모를 탐한 인물이었습니다. 포도대장은 어머니 한영이를 포도청에 가두었지만, 이상하게도 권진이는 이웃집에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그 배교자가 찾아와 유혹하며 “도망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권진이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후 포교(捕校) 중 한 사람이 권진이의 미모와 젊음에 반해 도망치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일이 발각되자, 관여된 관원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았고 일부는 사형을, 일부는 귀양을 당했습니다. 권진이는 한 교우의 집에 숨어 있었지만 추적 끝에 다시 붙잡혔습니다. 배교를 강요하며 갖은 고문이 이어졌지만,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어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곤장을 맞았습니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권진이는 감옥에서 교우들에게 편지를 남겼고, 이를 읽은 교우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스물한 살의 권진이는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