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권(1836~1866)은 충청도 진잠(현 대전 유성구 진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교인이라 모태신앙이었던 한재권은 부모님의 열심한 신앙과 착한 생활을 본받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한재권은 진잠 지역의 전교 회장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의 조카에 따르면 한재권은 충청도에 있을 때부터 ‘순교’를 열망했다고 합니다. 한재권의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 고산 다리실(완주군 비봉면 천호 공소)로 이사했습니다. 그 후 다시 교인들이 모여 사는 전라도 전주시 대성동(숲정이)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역까지 미쳤습니다. 그해 12월에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대성동 마을을 급습했습니다. 포졸들이 한재권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가 문을 열어주자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마을의 다른 교우들도 체포되어 모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체포되자 지인을 통해 석방 교섭을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지인은 비신자인데 별감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별감인 그를 통해 전주 감사에게 부탁해 아들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는 지인에게 너를 풀어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감사가 너에게 ‘천주교를 믿느냐? 안 믿느냐?’하고 물으면 너는 꼭 ‘안 믿는다’라고 답해라.”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아버님, 그 말씀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천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재권의 아버지에게 부탁받은 별감은 감사를 찾아가 돈을 많이 줄 터이니 한재권을 풀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감사는 “배교하겠다고 하면 풀어주려고 했는데 배교하지 않겠다고 하니 석방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별감이 계속해서 부탁하자 감사는 벌컥 화를 내며 “썩 물러가라!”라고 했습니다.
한재권의 아버지는 다른 경로로 관아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아들의 석방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뇌물을 받은 관리들은 한재권을 찾아가 배교하라며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다시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버님, 집에는 아들이 여럿 남아있으니 제가 순교하려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저를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저의 석방을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한재권은 체포된 교우들과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병인년 그 옛날에 ‘구름재’ 서릿발에
팔도는 ‘오가작통’ 피바다 이뤘을 제 묻노니
말하여라 한강아 대동강아
순한 양 ‘사학죄인’ 얼마나 죽었더냐”
( 『가톨릭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