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 전례력의 첫 주일, 우리는 다시 신앙의 시계를 ‘기다림’의 시간으로 맞춥니다.
12월이 되면 일찍부터 성탄절을 알리는 화려한 불빛이 여기저기 가득해지고, 우리도 성탄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조용히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깨어 있음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를 하시죠.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대개 우리는 이 장면을 심판의 순간으로 생각해,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묵상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궁금증도 가질 수 있습니다. “버려진 이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까?”
실제로 심판의 모습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비유처럼 구원받은 이들이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까요? 어쩌면 버려진 이는 일터 한가운데에서 ‘같이 있던 그가 어디 갔지? 사라졌네?’ 정도로만 인식할지도 모릅니다. 즉,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혹은 하느님이나 구원에 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만 찾을 수도 있습니다. 버려졌음을 인지하지도 못하며, 구원이라는 개념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 없이도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는 나, 주님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 채 익숙함 속에 안주하는 나, 하느님이 내 삶에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영적 상태가 아닐까요?
버림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는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미사에도 참여하며 봉사도 하지만, 마음은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멀어짐을 느꼈다면 다행입니다. 복음에서, 남겨진 이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찾으며 울부짖는다면 과연 하느님께서 그를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반드시 그에게도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멀어짐을 느꼈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인지했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기왕 버스 놓쳤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더 자자.’ 이런 태도라면 우리는 하느님께 그 무엇도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그런 영적 무감각에서 깨어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깨어 있으라.”라는 예수님의 권고는 단순한 준비 요청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민감해지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숨결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주님은 감각을 잃은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버려진 이가 나라면 서둘러 깨어나야 합니다. 대림은 단순한 기다림의 시기가 아니라,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