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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 순교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12-26 14:48:19 조회수 : 45

박종원(1792~1840)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박종원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셨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열성적인 교우 집안의 고순이(바르바라)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부부는 삼 남매를 낳고 교우들에게 본이 되도록 살았습니다. 박종원은 성품이 온화해 교우들과 교분을 돈독히 쌓았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 이를 바탕으로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특히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외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을 위험에 직면한 사람들에게는 대세(代洗)를 주었습니다.

박종원은 교우들에게 늘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같이 불쌍한 죄인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니 나도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듯 박종원은 ‘순교’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악습에 빠지면 상냥한 말로 그들을 타일러 회개시켰습니다. 교우들이 죄짓는 것을 볼 때 그의 얼굴에는 괴로워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박종원의 충고를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박종원의 이러한 신앙심과 성품을 보고 그를 서울의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기해박해로 3명의 서양 신부(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100여 명의 신자가 순교했습니다. 박종원은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돌보았고,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포도청에서는 박종원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결국 박종원과 아내는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는 이들 부부를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박종원은 다섯 차례나 형벌을 받아 팔과 다리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포도청에서 박종원을 형조로 이송했습니다. 형조에서는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박종원에 대한 사형 요청서가 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박종원은 천국과 지옥을 마치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해서 지내지 않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그에게 사형을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박종원은 당고개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먼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거룩한 순교자가 되어 천주께 영광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