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이 오랜 인사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주님 부활 대축일 저녁에 하신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라는 그분의 말씀은 이 인사를 받는 이들에게 참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고 결과적으로 모든 현실에도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된 저녁부터 바로 저는 이 보편된 선포와 더불어 저의 인사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곧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겸손하고 인내하는 평화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평화는 아무 조건 없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며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품어 안으시는 착한 목자이신(요한 10,11.16 참조)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인류를 갈라놓는 분열의 장벽들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참조). 그리스도의 현존, 그분의 선물과 그분의 승리는 인내로운 수많은 증인을 통하여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우리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선명히 빛나게 됩니다.
어둠과 빛의 대비는 우리 안에 파고 들어와 우리가 맞닥뜨리는 시련과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는 고유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초대하는 부름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가닿고자 하는 부름입니다. 평화는 폭력에 저항하고 폭력을 이깁니다. 평화는 영원의 숨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악에게는 “그만”이라고 외치지만 평화에게는 “영원히” 하고 속삭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지녔든 지니지 않았다고 느끼든, 우리 마음을 평화에 열려 있게 합시다!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또 우리의 손 닿는 곳 너머에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그 평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알아봅시다. 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이 두려움과 낙담 속에 모여 있는 곳에 오신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는 계속해서 그분 증인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서 문과 장벽을 뚫고 들어갑니다.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기 바로 전에 친밀한 신뢰를 나누시며 당신과 함께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그분께서는 무력으로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히 되풀이하십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요한 18,11; 참조: 마태 26,52).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는 무기를 내려놓은 평화입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의 평화는 비폭력 투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먼 이상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평화가 부정되거나 심지어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올바른 생각들, 사려 깊은 말들, 그리고 평화가 가까이 왔다고 말할 역량이 우리에게는 부족한 듯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화의 원수들도 사랑합니다.”2)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며, 관계를 단절하거나 줄기차게 비난만 하지 말고 경청하며 다른 이들과 최대한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급격한 기술 발전과 인공 지능의 군사적 활용이 무력 분쟁의 비극을 더욱 악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이 점점 더 기계에 ‘위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보호하는 인본주의의 법적 철학적 원칙들을 유례없이 파괴적으로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비판적 사고를 일깨워야 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
선은 무기를 내려놓게 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하느님께서 어린아이가 되신 이유일 것입니다. 가장 깊이 내려가 죽은 이들의 거처에까지 다다르는 그 강생의 신비는 젊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되어 베들레헴의 구유 안에서 드러납니다. 인간은 그분을 돌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루카 2,13-14 참조). 어린아이만큼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존재는 없습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위하여 종교가 해야 하는 본질적인 역할은 생각과 말까지도 무기로 삼고자 하는 유혹이 날로 자라나지 않게 막아내는 일입니다. 믿는 이들은 무엇보다 삶의 증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욕하는 이러한 형태의 신성 모독을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물론 평화의 길이요 전통과 문화 안에서 만남의 언어인 기도와 영성,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증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국제적 힘의 균형이 깨지는 가운데, 정의와 인간 존엄성의 위기는 경종을 울리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분쟁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희망을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영적, 문화적, 정치적 발의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세계화의] 원동력이 인간 의지와는 동떨어진 알 수 없는 비인간적 익명의 힘이나 구조의 산물인 양” “숙명론적으로 보는 시각”3)의 확산에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희년이 맺는 열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희년은 수많은 사람이 순례자로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마음과 정신과 삶의 무장 해제를 내면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을 이루어 주심으로써 분명 이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