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지혜 6,10-11)
광암 이벽(1754년생)은 영·정조시대 인물로 유교가 전통적 체제로써 사회,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기에 중국에서 가져온 서학책으로 구원의 진리를 탐구하며 깨닫고 스스로 교리를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이벽의 신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소중하고 귀한 깨우침을 줍니다.
광암 이벽은 천진암 암자에서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등과 함께 강학회를 열고 천주교의 교리를 탐구하며 함께 연구하였고, 이승훈을 중국에 보내어 조선의 첫 세례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명례방(현재 명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난 첫번째 박해의 중심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천진암이 있는 퇴촌면 초입부터 성지 입구까지의 좁은
1차선 길을 오르면서, 칠흑 같이 어두운 숲을 달려 천진암으로 향하던 청년 이벽의 벅찬 가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더 높고 더 넓은 곳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이벽에게는 현실의 그 무엇도 장애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벽은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인해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일을 굶었으며 그로인해끝내 병사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양반가의 자제이면서도 변변한 묘를 쓸 수 없어 묘지를 찾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저곳 이벽의 묘로 추정되는 곳을 탐문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침내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이벽의 묘를 찾아내었고, 천진암 강학회가 열렸던 1779년으로부터 200년이 되는 해인 1979년 6월 24일 요한 세례자 축일에 이곳 천진암 성지로 이벽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천진암 성지가 바야흐로 한국천주교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와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완전하게 갖추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