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의 첫눈이 드넓은 천진암 성지 위에 내렸습니다. 살짝 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온천지를 소복이 덮어버렸습니다. 사제관 앞을 나서며 내딛는 첫걸음이 멈칫합니다. 새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을 새기는 것이 조심스러워,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을 살펴 걷게 합니다.
1779년 기해년 겨울, 한밤중에 광암 이벽은 눈길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천진암에 도착합니다. 모든 선구자가 그렇듯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이벽은 홀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천진암에서 그를 기다리던 학자들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이 전부라 믿었던 성리학적 세계관을 - 비록 처음에는 조악하고 질서가 잡히지 않았지만 - 근본부터 바꾸어 새롭게 세우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세계 선교사에서 전무후무한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시작이라는 강학의 역사가 이벽이 내딛은 최초의 발걸음으로 열리게 됩니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붓을 대어 첫 획을 내려긋는 마음처럼 모든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세례받게 하고, 권일신을 비롯한 조선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을 감화하여 세례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저명한 학자들과 천주교 교리를 주제로 한 토론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명례방에서 이루어진 집회를 조직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벽의 발 앞에는 항상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그리스도의 빛이 머나먼 조선 땅에 이르는 길을 닦은 광암 이벽의 목소리였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우람했던 풍모, 그 해박한 논리에 반박할 자가 없었던 논변, 가문의 박해로 순교에 이르게 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세례 때 받은 주보성인의 이름, 요한 세례자를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이벽 요한 세례자가 지녔던 천부적인 자질과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 교회사에 남긴 발자취는 밝혀져야 할 역사의 영역이지만, 이벽의 영혼 속에 타오른 태초의 불길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양지바른 좋은 땅에 물길을 대고 거름도 준비되었지만 주님께서 씨앗을 뿌리지 않으시면 애초부터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시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좋은 계획에 성실한 준비를 마쳤다 할지라도 결국 주님께서 불을 지펴주셔야 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시작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새로운 시도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은총을 청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종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시작에 앞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께 전구기도를 청하십시오. 하느님의 종께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주님께 전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어두운 밤길을 내디뎠던 그 용기 있는 발걸음을 저에게 보여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