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림 시기의 마지막 주간 첫날이 시작되는 저녁에 교구민들은 큰 성탄 선물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보좌 주교님의 임명 소식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작은 환호의 기도를 입에 담았습니다. 새 보좌 주교님께서 ‘교구에서 마련한 모처에서 주교직무와 서품준비를 위한 피정에 들어가신다.’라는 소식이 따라왔습니다. ‘그렇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지.’라고 생각하며 가늠도 되지 않는 큰 십자가를 안고 침묵과 기도의 시간으로 들어가시는 새 보좌 주교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785년 용문산,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랜 친구와 함께 적막한 절에 찾아듭니다. 얼마 전 조선의 첫 신앙공동체인 명례방 집회가 관헌에게 발각되어 관련된 이들이 체포되는 위기상황(을사추조 적발사건) 속에서 정신적 지주였던 이벽 요한 세례자의 가문에 의한 순교 소식까지 듣게 된 그가 선택한 장소는 ‘외딴곳’이었습니다.
경기도 양근의 안동 권씨 집안 5형제 중 셋째로 학식과 덕망을 갖추었던 권일신은, 예수님의 부름을 듣자 즉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첫 번째 제자들처럼, 광암 이벽을 통해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던 그는, 형님이었던 권철신을 비롯하여 훗날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는 이존창과 호남지방의 사도로 활약하게 되는 유항검을 입교시키는 등, 막 태동하기 시작한 조선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북경을 다녀온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으며 극동아시아 선교의 주보이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명례방에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왔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을사추조 적발사건’과 연이은 박해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용문산에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침묵과 기도 속에 머무른 8일간의 은거는 조선천주교회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기 전 시나이산에서 머물렀던 40일과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셨던 광야의 40일, 주님께서 따로 찾으셨던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만나신 그 거룩한 시간이 용문산에 도착한 권일신의 시간과 겹쳐 흐르기 시작합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뒤로하고 돌아온 권일신은 조선교회의 조직을 세우고 가성직제도를 통해 선발된 10명의 사제 가운데 주교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1789년 가성직제도의 오류를 알게 되어 성직을 내려놓게 되었어도 1791년 신해박해 때 매맞아 순교하기까지 그는 실질적인 조선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느님을 만나 선택한 그 길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복음을 따르는 이에게 죽음은 더이상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침묵 속에서 길을 물으셨듯이,
저희도 선택의 순간에 먼저 하느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