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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죽음보다 강한 순교 하느님의 종 황근동 요한(1839~1866)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6-02-26 16:45:28 조회수 : 29

독일의 한 수도원에 두 명의 노 수사 신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 훌륭한 인품과 카리스마로 수도원 안팎에서 존경받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원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말을 섞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분이 회랑에서 갑자기 가슴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 수사님뿐이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달려가 자신을 품에 안은 동료에게, 쓰러진 수사님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그 손 내게서 치우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번에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에는 ‘용서’가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용서받기 위해,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와 증오는 때로는 죽음보다 강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조차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말, 죽음 앞에서 용서할 수 있을까요?


수원 초평리(현 의왕시 초평동)출신의 하느님의 종 황근동 요한은 양반 가문의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에게서 신앙을 이어받았고, 안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족들은 박해의 기운이 짙어질 때마다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끝에 그의 가족은 양지 은다라니(현 용인시 양지면 대대리)로 들어가 살게 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닥치자 관헌의 손길은 집안 전체를 겨누었습니다. 아버지 황하륜과 큰형 황운동, 둘째 형 황진동이 차례로 붙잡히게 됩니다. 막내였던 황근동은 후사를 위해 가족을 따로 피신시키려 합니다. 그는 부인 함종 어씨와 가문의 재산을 지인의 집에 맡겨 두고, 피할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지인은 재산을 탐냈고, 포졸에게 “황근동이 천주교 신자”라고 밀고합니다. 믿었던 이의 배신이었습니다.


황근동 요한은 붙잡힌 뒤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합니다. 팔이 부러지는 등 큰 상처를 입은 채 수원으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1866년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수원 유수부에서 순교합니다. 마지막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이 있었을까요. 배신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전혀 없었을까요. 우리는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순교가 단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증오와 복수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는 용서의 열매입니다. 순교가 인간의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듯, 용서 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졸지에 가산을 잃고 과부가 된 함종 어씨는, 먼저 순교한 큰형 황운동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울 신학당 근처에 살며, 신부님들의 제의를 만들며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순교자 가족의 손길로 지어진 그 제의에는 분명 원망이 아니라 용서가 한올한올 스며 있었을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는, 순교의 덕을 청할 때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황근동 요한,

용서하지 못하는 저희 마음에 순교의 참된 의미를

새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