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 역사 초창기부터 등장하는 사적지로서 수원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인 왕림 성당은, 1888년 7월 14일에 설립되어, 올해로 설립 138년을 맞이합니다. 설립 당시 관할지역의 신자 수가 약 1,700명이나 되었으며, 하우현 성당·미리내 성당·북수동 성당 같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본당들이 왕림 성당을 모본당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왕림 성당이 갖는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왕림 성당’의 또 다른 이름은 ‘갓등이 왕림 성당’입니다. ‘갓등이’라는 말은 박해받던 시대 사제를 비밀리에 지칭하던 은어로, 갓을 쓴 등불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박해시대 목숨을 위협받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빛을 밝히는 등불 같은 푸른 눈의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발각되면 곧장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었기에 그분들의 헌신이 오래도록 빛이 되어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현재의 성당은 설립 이후 네 번째 건물이며 두 번의 한옥 성당을 거쳐 1980년대 중반에 건축되었습니다. 성당 앞쪽에는 1902년에 축성된 한옥 사제관이 예전의 고풍스러운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사제관은 한 번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사제관은 갓등이 공소를 왕림 성당으로 승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뮈텔 주교님이 1902년에 축성하셨습니다. 당시 미리내 성당의 주임이었던 강도영 신부님께서도 이 축성의 순간을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사제관 앞쪽으로는 조경이 잘된 넓은 정원이 있는데, 수령 100년이 넘은 향나무와 벚나무가 성당의 오랜 역사와 신앙의 세월을 상징하듯 굳게 서 있습니다. 봄날 활짝 피어난 왕벚나무를 마주한 순례자에게 이 꽃은 마치 혹독한 박해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신앙의 기쁨처럼 다가왔습니다.
왕림 본당 1대부터 5대까지 주임 신부님은 당시 한국천주교회 초기 선교의 중심에서 헌신하셨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셨습니다. 특히 초대 주임 앙드레 신부님은 왕림 본당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했고, 2대·4대 주임 알릭스 신부님은 사제관과 초가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뮈텔 주교님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낯선 이 땅에 오셔서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오늘날 왕림 본당이라는 큰 나무로 자랐음을 느낍니다. 사제관 마당의 벚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시간을 멈추게 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신비로움 속에서 그분들의 헌신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