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는 말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서문에서 카라마조프 가문의 삼 형제 가운데 막내 알료샤를 “나의 주인공”이라 부르며 소설을 시작합니다. 이 ‘위대하지 않은’ 평범한 주인공은 큰형 드미트리만큼 강인하고 다혈질적이지도 않고, 둘째 형 이반처럼 지적이고 냉철하며 철학적 사유가 깊지도 않습니다.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해 보이는 막내는 스스로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중재하며, 인간의 선함과 회개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으려 합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알료샤는 주인공이라기엔 존재감이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인물이 지닌 성품과 영적 성장 과정을 통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막내 사랑’은 지극합니다. 형 카인보다 동생 아벨이 더 사랑받았고, 장자권과 축복은 큰형 에사우가 아니라 동생 야곱의 차지였습니다. 야곱 또한 열두 아들 가운데 막내였던 요셉과 벤야민을 끔찍이도 아꼈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사무엘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준 이는 일곱 형이 아니라 막내 다윗이었습니다. 집을 잘 지킨 큰아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했지만, 집을 나갔던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 가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 또한 제자단의 막내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막내만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서열과 기대를 뒤집는 은총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는 성경의 언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하느님만 그러실까요. 어느 집안이든 막둥이는 사랑을 더 많이 받기 마련입니다.
수원 걸매리 박씨 삼 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하느님의 종 박익서는 큰형과 열다섯 살 차이가 났습니다. 형님들 등에 업혀 자란 시간이 더 많았을 그는, 분명 사랑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모범적인 공소회장이었던 큰형 박의서 사바, 방탕한 삶을 살다 마지막에 회심한 둘째 박원서 마르코에 비해 박익서에 대한 기록은 풍부하지 않습니다. 그의 성품이나 신앙생활은 물론 세례명조차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이름은 늘 형들의 이야기 속에 함께 등장합니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눈에 띄지 않게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 행전에 남겨진 것조차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조용함’은 미미함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사람이 지닌 단단함이었습니다.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신앙을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1867년 수원 진영에서 두 형이 순교하는 자리에도 박익서는 함께했습니다. 그의 ‘이름 없는 성덕’은 구원의 사건을 마음에 담아 ‘곰곰이 되새기던’ 성모님을 닮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보다 ‘가장 사랑받은 제자’라는 호칭이 더 소중했던 요한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이 써 내려간 복음으로 구원의 역사를 증언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종 박익서는 형들의 순교 곁에 머문 조연이 아니라, 사랑받은 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순교로 보여 준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종 박익서!
저희가 주님 사랑의 증명을 요구하기보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바라보게 하시고,
이미 받은 사랑을 삶으로 증거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