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 미사신도시. 옛 기억과 다정한 이야기가 흐르던 흙길은 흔적도 없이 파헤쳐 사라지고, 메마른 거대한 아파트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숨 막히는 도시 개발 속에서 거짓말처럼 흙의 온기를 머금은 나지막한 숲이 있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 바로 ‘구산 성지’입니다.
마치 신도시의 차가운 아파트 단지와 성스러운 은총의 땅을 구분하려는 듯 거북이의 등을 닮은 거칠고 높은 경계로 담을 세운 구산 성지는 세상의 욕심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이 굳건히 세워져 있습니다. 콘크리트의 장벽이 턱밑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그 경계 너머에는, 따스한 흙의 온기를 머금은 숲이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간직한 채 순례자를 반겨줍니다.
구산 성지에는 순교자의 무덤을 거북이등 모양으로 형상화하여 만든 납작한 기와 대문인 ‘은총문’이 있습니다. 은총문을 들어서면 185년 전 목숨을 바쳐 신앙을 고백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사랑과 평화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살아도 천주교인,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요.”라고 고백하며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그 형제들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제 모방 신부가 구산 교우촌을 사목 방문했을 때 성사를 돕고 공동체를 이끌며 교회의 기틀을 다지신 분입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성인의 진묘를 비롯해 함께 순교한 동생들과 아들,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심칠여 등 구산 교우촌 신앙 선조들의 진묘와 의묘(가묘)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묘역 뒤편 잔디광장에는 마치 하늘을 향해 뻗은 솟대처럼 보이는 아주 높다란 10개의 순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탑의 끝자락에는 순교자 9위 한 분 한 분의 거룩한 신앙을 형상화한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개의 십자가는 이곳을 방문하여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 ‘나’자신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푸른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십자가를 올려다 보며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묵상해 봅니다. 그 신앙 선조들의 신앙 앞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시 세상속으로 파견될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