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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 하느님의 종 정여삼 바오로(1822~1866)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6-08-20 16:25:39 조회수 : 6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1966년작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15세기 러시아의 성화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전쟁과 약탈, 살육이 끊이지 않던 시대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춥니다. 이런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침묵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 「종」에서 루블료프는 젊은 종 제작자 보리스카를 만납니다. 그는 죽은 아버지에게 종 만드는 비법을 배웠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아무것도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실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사람들을 다그치며 흙을 고르고, 거푸집을 만들고, 쇳물을 부어 거대한 종을 완성합니다. 마침내 추가 움직이고,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깊은 종소리가 들판으로 퍼져나갑니다. 사람들은 환호하지만 보리스카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합니다. 청년은 루블료프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루블료프는 그런 청년의 손에서 완성된 종을 바라보며 다시 붓을 들 이유를 발견합니다. 인간의 과오와 결핍도 끝내 하느님의 선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랜 침묵을 깨고 청년을 끌어안으며 말합니다.

“자네는 종을 만들게. 나는 성화를 그리겠네.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일이 되겠는가.”


1822년 충청도 직산에서 태어난 하느님의 종 정여삼 바오로는 용인 삼배일 점촌(현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으로 이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조카 정덕구 야고보의 가족과 함께 옹기를 구우며 살았습니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옹기 가마터를 벗어난 바깥세상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신자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에 놓인 흙덩이는 꼴을 갖추고 불 속에서 단단해져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태어납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찬미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연약한 인간성에 대한 연민을 하느님의 종은 소박하게 구워낸 옹기 안에 함께 담아내었을 것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정여삼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포졸들은 다른 신자들의 거처를 밝히라며 그를 폭행했지만, 그는 “죽을지언정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밝힐 수는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흙이 불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정여삼 바오로는 결국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순교하였습니다.


정여삼 바오로의 손에 들린 흙은 박해의 시대에도 날마다 그릇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을 때에도 그는 묵묵히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만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상처 입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사업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평범한 일들 또한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를 이어가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서지는 것들을 바라보다 손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에는 아직 빚어야 할 흙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종 정여삼 바오로,

저희의 부족한 손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삶을

충실히 빚어가게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