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Credo(크레도)는 “저는 믿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미사 중에 바치는 신경도 이 한마디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외우는 신경의 문장들에는 오랜 질문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논쟁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4세기 초,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신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교회는 325년 니케아에 모여 성자께서 성부와 ‘한 본체’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났다고 모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질문하고 답을 찾으며 자신들이 믿어 온 신앙을 더 분명한 언어로 표현해 갔습니다.
교회는 믿음이 없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더 깊이 물었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답을 모를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더 큰 위험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 여기는 완고함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양근에서 태어난 하느님의 종 김일호는 학문을 닦으며 의술을 배운 지식인이었습니다. 1799년 서울로 이주한 그는 약국을 경영하던 정인혁 타대오에게 『천주실의』를 빌려 읽고 천주교 교리를 진리라고 여겨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라 믿는 가르침을 만났다고 해서 생각하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황사영 알렉시오, 최필제 베드로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교리를 연구했습니다. 정약종과 교리에 관한 의견이 달라 논쟁을 벌였고, 황사영과도 교회를 지키는 방법을 두고 격론을 벌였습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김일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약종이 회장으로 있던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육회의 회원이 되어 서울과 지방에 교리를 전하고 이를 실천했으며,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주일과 축일 미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례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질문했고, 교회 안에서 논쟁했으며, 교회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찾아갔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동료들이 붙잡히고 순교하자 김일호는 해주와 충주 등으로 피신했습니다. 일곱 달 동안 도피하다 붙잡힌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죽음을 면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신앙을 변명하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 첫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1802년 1월 29일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이튿날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평생 묻고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찾아갔던 김일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은 가장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천주교 신자입니까?” 그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질문의 끝에 던져진 마지막 질문 앞에서 김일호는 자신의 목숨으로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의 종 김일호,
저희가 교회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고 깨달은 바를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