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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명’에 대한 감수성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2-04-29 11:26:20 조회수 : 691

 사회적 생명에 대한 감수성


오랜 친구와 이십여 년 만에 연락이 닿았습니다. 인연이 돌고 돌다 보니 결국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요. 마침 온 가족이 제가 일하는 학교 근처로 올 일이 있다고 하여, 캠퍼스에서 만나는 게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3년 전 친구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아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던 멋진 소년은 자신의 꿈과 조금 멀어졌지만 절망하지 않고 씩씩하게 재활 치료를 받고 있지요.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장애인 이동권이 고려되지 않은 곳에서는 혼자 다닐 수 없다 보니, 학교에서 만나려면 함께 움직일 동선을 확인해 큰 불편 없이 이동할 수 있을지 살펴야 했습니다. 지도만 보고는 알 수 없으니,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과 오르막길이 없는 곳을 찾아 통행 경로를 확인하며 직접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편의 시설을 나름 잘 갖추었다고 알려진 곳인데도 장애인들이 이동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도 휠체어를 타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강의실에 도착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겪어 왔는지 한 번도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성모 성월의 첫 번째 주일인 51일은 한국 천주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 정한 생명 주일입니다. 친구의 가족들이 제게 선물한 귀한 가르침을 새기면서, 저는 오늘 인간의 사회적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은 개체와 종족 유지를 목표로 하는 자연적 생명뿐 아니라, 생명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적 생명을 포함합니다. 모든 생명은 무리,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생명들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생명의 권리는 자연적 생명권뿐 아니라 사회적 생명권 또한 아우르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생명 감수성이란 육체의 고통과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고통과 죽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의 지향과 태도를 일컫습니다.

 

자연적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도 이미 위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태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사회적 생명을, 어쩌면 경각심과 안타까움조차 느끼지 못하며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가령,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하기 위해 이어왔던 출근 지하철 시위에 대해 전장연이 출퇴근 시간을 볼모 잡아 지하철 문에 휠체어 넣는 식으로 운행을 막아 세웠다.”며 경찰개입을 주문하거나, “선량한 시민에게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장애인들을 야만시하고 비난하는 행동들을 생각해 볼까요.

 

코로나19 감염으로 다만 며칠을 격리 상태로 지낸다 해도 고립된 삶의 비인간화를 체험하게 되는데, 지하철을 이용하는 정도의 아주 기본적인 이동권도 확보되지 않아 혼자 밖에 나갈 수도, 교육을 받을 수도, 일할 수도, 친구를 만날 수도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된 채 살아야 하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비장애인들은 한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12cm(지하철 타는 곳의 간격)에 장애인들은 목발이 빠져 고꾸라지고, 휠체어 바퀴가 끼어 몸이 튕겨져 나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부와 정치권이 듣지 않기에, 당연해야 할 출근길 대신 출근투쟁에 나서 수많은 이의 욕설을 몸에 꽂으며 지하철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생명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며 존엄을 느끼고 함께 분노하지 못할망정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면, 우리의 생명 감수성은 과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미국의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가 쓴 짐을 끄는 짐승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관절 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진 테일러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삶의 매 순간 상기해야 했다고 합니다. 비장애 중심주의, 즉 비장애인들의 몸과 시선만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살아오며 스스로를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고 의존적이고 나약한 존재로만 생각해 왔다는 것이죠. 그러나 테일러는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과 공장식 축산, 인간을 위해 가축화된 동물들에게서 발생하는 장애를 목격하면서 비장애 중심주의가 실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간의 인위적인 시각이며, 비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한 지독한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젖을 생산하도록 품종이 개량된 젖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살찌운 돼지, 마취 없이 부리를 절단당한 오리 등. 이처럼 인간의 목적을 위해 유전자를 함부로 조작하고 이용하는 자연적 생명에 대한 살상행위나 이성과 언어, 건강한 신체 같은 인간 중심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하며 사회적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적 생명에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자연적 생명 또한 보호하지 못합니다. 사회적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건강하게 피어날 수 있는 자연적 생명은 없는데도 우리는 때로 자연적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생명에 너무 무감각한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타인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입니다(2020329, 삼종기도에서). 교종은 우리가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돌을 치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으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나와 다르다 하여 이웃을 비난하고 파멸시키는 것은 죽음입니다. 생각과 생활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하여 이웃을 모욕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나의 시야 밖으로 몰아내고 소외시키는 것은 죽음입니다.

 

사회적 생명들을 살상하는 이 죽음의 돌들을 치워야 합니다.


글ㅣ조민아 마리아(조지타운 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