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진리와 자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외적으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을 마주하십니다. 믿는 유다인들이라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고백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닫혀 있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에 급급한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래도 이들을 믿는 사람들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믿지 않는 이들, 대표적으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완고함은 어느 지경이었을까 어림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의 구원사업 대상 속에 이들까지 포함해야 했던 예수님의 사명이 참으로 험난해 보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가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시며,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믿고 따름을 의미하며, 이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인간에게 충만하고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는 진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한데 모아주는 진리를 말합니다. 곧 예수님에게서 드러나고 또 그분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리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믿음과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결정적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또는 철학적 영역에서 논의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허락해주는 자유를 말합니다.
자유라는 언급 앞에서 유다인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유다는 자주 외국의 정치적 지배 아래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반응은 유다인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정치적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신앙 안에서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으로서,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분,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 파견하신 분임을 거부한다는 것은,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자유롭지 못함을, 곧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아님을 스스로 고백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례성사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충만하고 참된 생명을 가져다주며 우리를 일치로 이끄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며, 끝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고 이 세상에서 이미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온전한 자유를 허락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고마운 믿음의 길로 이끄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 하루 하느님 말씀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진리가 있음을 고백하고, 온전한 자유로 의로움을 향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이웃과 화목을 이루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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