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빵 III
오늘 말씀은 어제의 마지막 말씀, 곧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하신 말씀과 유사한 내용으로 열립니다. 오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하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 바로 그분이 이끌어 주신 사람임을 확인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더욱 체감하고 확신에 이르게 되는 부분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이끄심, 하느님의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 덕분에, 또는 누군가의 권고에 의해서, 또는 스스로 찾아서 신앙의 길에 들어선 것 같지만, 그것조차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렇게 고귀하고 위대한 선물을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해야 할 일이란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구체적인 신앙 행위로 표현해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하는 약속까지 더해주시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약속 실현을 위해 우리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상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바로 이 약속을 보증하는 표징으로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는 아직 신약성경이 탄생하기 이전이므로, 구약성경을 가르키는) 성경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서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던 유다교도들을 향해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하고 단언하십니다.
성경이 바로 하느님 이끄심의 도구요 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오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듣지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가 광야의 양식이었던 만나 제공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양식인 만나가 예시하는 표징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표징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죽은 조상들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만나가 육적인 생명 보존에 필요한 양식이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고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서 불만과 불평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상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시어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 미래를 여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그 뜻을 되새기며, 그리고 자주 미사 참여를 통해 그분의 몸을 직접 모시는 가운데, 죽음의 문화를 거두어 치워버리고 생명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 소중하고 유익한 하루, 그분이 주실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임을 전파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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