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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5-09 조회수 : 121

요한 6,52-59 
 
삼위일체 신비의 실현인 성체성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성체성사로 삼위일체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을 먹으라는 말씀을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삼위일체의 첫 번째 신비,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을 아드님께서 받아 새 생명을 가지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의 세례 때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는 성체가 피로 변해서 성무일도 종이에 흡수되어버리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종이는 생명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체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다른 종이들은 버려져도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체를 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는 남편이 피땀 흘려 밖에서 돈을 벌어서 아내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돈은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먹을 것을 사서 자신도 먹고 남편도 주고 자녀들에게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이 예수님 세례 때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모든 것이겠습니까?
이렇듯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이자 모든 것, 곧 신성을 의미합니다.  
 
성체가 종이에 흡수되면 그 종이 안에 머무는 것처럼 이제 가진 돈을 다 내어준 남편은 아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아내가 재워주고 먹여주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전부 줄 수 없다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상대에게 맡겨 그 안에 머무는 일이 아버지가 아드님께 하신 것이고,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고 사제가 신자들에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제 어떻게 아내가 남편에게, 아드님이 아버지께, 신자들이 신부 안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예수님은 삼위일체 신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가 아드님께 생명의 성령을 주셔서 아드님 안에 머무는 것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모 마리아 안에 머물게 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드님께서 아버지 안에 머무시게 될까요? 바로 ‘아버지의 뜻’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여기서 ‘계명’은 아드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생명을 내어준 이의 뜻에 머물면서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을 품에 안으셨지만, 동시에 하느님 안에 머무시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은 밀떡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인들 안에 들어가 그들도 커다란 성체로 만들어야 하는 뜻을 지닙니다.
만약 성체가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발이 달려 다른 곳으로 도망 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체이기는 해도 쓸모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안에 들어가 죽지 않는 신자 또한 스스로 버려진 성체와 같아집니다. 생명을 받은 이는 ‘순명’으로 그 생명을 준 이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땅에 보물이 있다고 두 아들에게 준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한 아들은 땅을 다 파 보았지만, 보물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 땅을 팔아버렸습니다.
다른 아들은 어차피 땅을 파는 것,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땅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땅이 전부였습니다.
두 아들에게 주었지만, 한 아들은 그분의 계명을 따르지 않아 아버지의 전부와 같은 땅 안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야곱에 에사우의 땅에 살기 위해 올 때 마치 에사우가 살았을 것처럼 살아서 그 열매를 가져와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에사우의 땅에 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버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고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어떻게 한 분 안에서 이 교환의 신비가 일어나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자 구분되는 세 분이십니다.
세 분이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생명을 아드님께 주십니다.
그렇게 성령님을 통하여 아드님은 생명을 가지게 되고 아버지는 아드님 품에 머무시게 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머무시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순종을 통해 아드님은 당신 생명을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아드님은 이렇게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다 내어줌과 순종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 자녀인 것과 같습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자신도 세상에서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켜야 하는
순종의 의무를 다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를 통한 삼위일체 신비의 교리의 복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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