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화
한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인사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검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어 자고 나면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시기 또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들던 시기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또는 진지 드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은, 수면 또는 음식 섭취 문제를 떠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그토록 절박하고 절실한 인사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적극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지역은 중동 지역이라고 합니다. 유다인들의 인사말인 샬롬은 히브리어로 충만 상태 또는 인간이 모두 바라는 완전한 평화를 의미하며, 회교도들의 인사말인 앗살람 알라이쿰은 ‘당신에게 평화를’을 뜻합니다. 늘 불안한 지역이기에 평화에 대한 축복이 인사말로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하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향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운 양식의 인사말이 아니라, 당시의 인사말을 인용하시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시는 듯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시니,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평화, ‘Pax Romana’나 ‘Pax Britanica’ 또는 ‘Pax Americana’와 같은 그야말로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평화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꼼짝 마!’하는 표현을 점잖게 옮겨놓은 수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평화’라는 단어가 자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화는 행복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 행복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평화는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아와,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현존과 늘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입니다. 따라서 평화로운 사람, 곧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며, 따라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는 사람, 오히려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사람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명의 관계로서 성부께서는 성자의 순명에 대한 응답으로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또 이 영광이 제자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성부께 돌아가심으로 영광의 길에 들어서시며, 이 길은 바로 제자들을 영광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대로 따름으로 비로소 가능한 행복을 말합니다.
철저한 믿음과 성실한 따름에 기초한 평화의 삶, 행복의 삶에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삶 속에서도,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수난과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려는 용기와 희망을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부활 신앙인답게 믿음으로 충만한 평화의 삶을 맘껏 누리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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