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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16일 _ 김건태 루카 신부

작성자 : 김건태 작성일 : 2025-06-15 조회수 : 40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해를 본 그대로 갚아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흔히 동태(同態) 또는 동해(同害) 복수법이라 불리는 탈리오법칙은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법전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282개조로 되어 있는 이 법전은, 196조에서 눈에는 눈, 197조에서 뼈에는 뼈, 200조에서는 이에는 이를 법적 정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사적 사안이 아닌, 요즘으로 치면 민사적 사안에 대해서도, 이 법전은 어김없이 동태보상의 원칙을 적용합니다. 형법의 발전에서 아직 벌금형이나 구금형이 마련되어 있지 않던 상태에서, 이 동태복수법이 기여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제한적 복수를 금지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피해를 본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부 조항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규정이 나옵니다. 목수가 누구 집을 잘못 지어 지붕이 내려앉고 그 통에 집주인의 아들이 깔려 죽었을 경우, 공정한 보상 차원에서 목수의 아들이 죽음에 부쳐져야 했습니다. 집주인의 딸이 죽었다면, 목수의 딸이 죽어주어야 했고, 집주인이 깔려 죽으면, 당연히 목수 자신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현대 코미디물의 대본 작가들이라면, 이 동태복수법으로부터 재미난 대사들을 얼마든지 엮어낼 만합니다. 예를 들어, 개에게 엉덩이를 물렸으면, “너도 가서 개 엉덩이를 물어라. 엉덩이 이상은 안 된다.” 고양이가 생선을 훔쳐 갔으면, “너도 가서 고양이의 생선을 훔쳐라. 생선 이상은 안 된다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웃을 일도 아닙니다. 근동(近東)에서 발원한 동태복수 문화는 수메르나 아카드,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서양 문명의 양대 초석이 된 히브리 문명과 그리스 문명에 전승되었고, 지중해 일원으로, 그리고 결국 이슬람 전통 속으로도 침투해,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형태로든 복수라는 개념과 거리가 너무나 먼, 그래서 충격적이면서도 명료합니다: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구약시대였다면,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가르침에 대하여 우리는 이러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희 (인간) 입장에 서 계시다면, 과연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주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가르치신 그대로 살아가신 이상, 더 이상의 항변, 더 이상의 이의 제기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언행일치의 삶, 지행일치의 삶, 나아가 믿는 대로 실천에 옮기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 신앙인들로서, 다른 뺨을 대주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까지 가주기는 당장 힘들어 보이더라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 그런 삶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내려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고,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음만이라도 그대로 본받고자 노력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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