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38-42
피해망상적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구약은 세상의 법입니다.
세상 법은 최대한 피해 입힌 대로 보상해주라는 정의를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상대의 잘못으로 눈이 한쪽 잘못되었는데, 두 쪽을 잘못되게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이 한쪽 잘못돼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심판관이 당신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건너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인간-하느님의 법의 순서대로 성장합니다. 인간의 법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동물의 수준이면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전거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도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어떤 스님의 제자가 명상만을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발전이 없습니다.
스님은 돌을 숫돌에 갑니다.
땀을 흘리며 돌을 가는 스승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돌을 왜 숫돌에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돌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이 녀석아, 네가 명상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이와 같다.”
먼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부터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돈이라도 꿔서 갚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냥 그 사람이 하는 짓이 모두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한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처럼 정의로워지기 이전에 먼저 세상의 정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아직 인간적인 수준에도 오르지 못한 이들이 신앙생활 할 때 피해망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속의 원인 모를 미움과 분노를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너의 그 미움은 정당하지 않다’고 속삭이지만, 그 목소리를 인정하기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그 미움의 대상을 ‘나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이 나를 공격하기에 나의 미움은 정당한 방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허먼 멜빌의 위대한 소설, 『모비딕』의 에이해브 선장은 바로 이 비극적인 자기기만의 가장 강력한 상징입니다.
에이해브는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노련한 선장입니다.
그는 과거에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고는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다리를 잃은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삭이고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세상 모든 악에 대한 증오로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증오를 ‘모비딕’이라는 존재에게 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모비딕은 더 이상 이성을 가진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성을 상실한 짐승에 불과한 고래에게 인격적인 악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선원들 앞에서 이렇게 정당화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사람이여, 그저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네. ... 인간이 치려거든, 그 가면을 뚫고 쳐야 한다! 어찌 죄수가 벽을 뚫지 않고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에게 흰 고래는 바로 그 벽일세.”
에이해브에게 흰 고래는 자신을 가두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의 ‘가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와 증오라는 감옥을 부수는 대신, 그 감옥의 벽을 외부의 존재인
‘모비딕’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 피해망상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가 이끄는 공동체 전체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첫째, 그는 선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고래를 잡아 기름을 얻어 항해를 성공시켜야 할
그의 배는, 오직 선장 한 사람의 복수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돛대에 박아놓고 흰 고래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외치며, 선원들의 이익과 자신의 광기를 교묘하게 결합시켰습니다.
공동체의 목표가 한 개인의 뒤틀린 망상에 잠식당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동료들의 이성적인 목소리를 억압했습니다.
오직 일등항해사 스터벅만이 그의 광기를
지적하며 “이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흰 고래에게 복수하다니요! 미친 짓입니다!”라고 외쳤지만,
에이해브는 듣지 않았습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향한 건강한 조언마저 자신을 방해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쿼드호는 장대한 추격전 끝에 모비딕을 만나고, 삼일간의 사투 끝에 파괴됩니다.
에이해브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모비딕의 몸에 작살과 함께 엉켜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료가 그의 광기와 함께 수장됩니다.
에이해브의 비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삶의 ‘흰 고래’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상처와 열등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 배우자나 동료, 혹은 특정 집단을 ‘나를 해치려는 악의 가면’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카인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 아벨에게 피해를 본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형제를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이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그 합당한 이유는 없어서 양심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상이나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든다고 스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나에게 해를 가한 만큼만 미워합시다.
이것이 용서를 위한 시작입니다.
거울이 되려면 먼저 돌에서 쇠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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