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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6-28 조회수 : 128

복음: 루카 2,41-51 
 
의미: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일상에서 찾는 것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며,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향한 그 순결하고 깊은 사랑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 바로 성가정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되찾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 강론의 핵심이자, 성모님 마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성모님께서는 당신 삶에 일어난 모든 일, 특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거듭 묵상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그 일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와 목적, 곧 ‘섭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함, 곧 교만한 마음의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우연’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모님의 이러한 태도와 정반대의 것을 평화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특히 현대 심리학의 한 흐름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최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김주한 교수는 그의 책 『내면 소통』에서, 인간은 ‘경험자아’와
그것을 되새기는 ‘기억자아’ 때문에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필연적인 이유를 찾으려는 순간, 우리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우연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험자아가 날뛰기 시작한다.
뭔가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순간, 즉 필연성을 부여하는 순간 경험자아는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결국 ‘내가 뭘 잘못했나?’ 혹은 ‘누구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온갖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으로 ‘그냥 일어난 일(Just happened)’이라고,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솝 우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어리석은 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매일 하나씩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의 신비를 기다리고 감사하며 그 의미를 헤아리는 대신,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으려는 조급함에 사로잡힙니다. 
 
거위의 배 속에 거대한 황금 덩어리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착각, 즉 거위의 생명과 그 과정의 의미를 무시하고 눈앞의 결과라는 ‘우연’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거위의 배를 갈랐고, 결국 황금알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찾는 인내를 포기하고 눈앞의 우연에만 집착하는 삶의 끝이 얼마나 허무하고 파괴적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화입니다. 
 
마찬가지 성경 사례로, 루카 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을 맞이했을 때,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구나, 이웃과 어찌 나눌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풍년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운이 만들어낸 '우연한 대박'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볼 겸손함이 없었기에, 감사가 아닌 탐욕으로 반응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은총을 '행운'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쌓아두려는 불순한 마음만 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직감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섭리의 순간'이 아닌, 잘못 걸려든 '재수 없는 사건(우연)'으로 취급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냉소적으로 물으며 진리를 외면하고 손을 씻는 행위는, 섭리를 우연으로 격하시켜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마음의 전형입니다.
마음이 불순하면 진리 앞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 상황을 '우연'으로 치부하여 도망갈 구멍을 찾습니다.
이런 사례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이는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고 창조자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허락하시는지 기억하고 곰곰이 묵상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뜻 따라 선택을 이어갑니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우주 자체의 신비 앞에서도 힘을 잃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우주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얼마나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ed)’ 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고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중력의 힘, 원자를 묶어주는 힘, 우주 팽창의 속도 등 수많은 물리 상수들이 지금의 값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별과 행성은커녕 원자 하나도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눈먼 ‘우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강력한 태풍이 고철 처리장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 완벽한 보잉 747 여객기가 저절로 조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는 진화론적 관점의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우연에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는 삶의 고통을 감내할 힘이 없어집니다.
이 지점에서, 20세기 최악의 역사적 비극의 한복판을 통과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의 외침이 우리 영혼에 경종을 울립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는,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인간에게서 마지막까지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건 자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우연이 아닌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존재에게 허락된 교육과정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이야말로 빅터 프랭클과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준 ‘의미를 찾는 신앙’의 원조이자 정점이십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사흘 동안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애가 타고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이 수없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사건을 불행한 ‘우연’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찾은 후에도,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는 아들의 알 수 없는 말씀을 포함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과 상실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때 세상의 목소리처럼 ‘이건 그냥 우연이야’라며 의미를 포기하지 맙시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그 모든 고통과 기쁨,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하는 용기를 청합시다. 
 
그 안에서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용기를 얻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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