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마태오 13,47-53
가톨릭교회가 쇄신에 더딘 이유
한국 가톨릭 신자의 주일 미사 참여율이 10% 아래로 떨어졌다는 뼈아픈 보고서를 마주하는 오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00년이나 된 찬란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낡은 유물처럼 희미해져 가는 걸까요?
교회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정답이라 믿는 '새로운 것'을 버려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다급하게 ‘새로운 것’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더 신나는 성가, 더 세련된 프로그램, 더 젊은 감각이 시급하다고 외칩니다.
물론 다 필요한 노력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조금 다른, 어쩌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옛것’, 즉 복음이라는 이 엄청난 보물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해 본 적이 있는 걸까요?
처음에는 저도 그저 '요즘 애들은 글을 안 읽는다니, 그림으로 보여주자!' 하는, 어찌 보면 단순한 생각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유튜브라는 ‘새로운 그릇’이 아니라,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즉 복음이라는 ‘옛 보물’을 제가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제가 복음의 깊이를 모르면, 아무리 화려한 영상 기술을 써도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요란하게 흔드는 꼴이 될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도약은 언제나 ‘옛것’에 대한
지독한 이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03년, 인류의 오랜 꿈이었던 비행을 마침내 성공시킨 라이트 형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를 뚝딱 만들어낸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흔한 ‘옛것’, 바로 자전거 가게 주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자전거를 만들고 고치면서, 두 바퀴로 달리는 이 단순한 기계 안에 숨겨진
동력과 균형, 저항이라는 물리학의 핵심 원리를 뼛속 깊이 터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전거를 그저 땅 위를 달리는 기계로만 볼 때, 라이트 형제는 그 안에 숨겨진
‘비밀’, 즉 하늘을 날 수 있는 원리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땅의 기계인 자전거라는 ‘옛것’의 원리를 완벽히 이해했기에, 비로소 하늘의 기계인 비행기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전거의 원리를 대충 알았다면, 그들의 비행기는 결코 1미터도 날아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우리에게 벼락처럼 내리치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를 말씀하신 뒤,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마태 13,51)
이 질문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다 들었느냐?”가 아니라 “다 ‘깨달았느냐’?”고 물으십니다.
비유라는 겉포장 속에 숨겨진 하늘 나라의 비밀, 그 작동 원리를 파악했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그제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헌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여기서 ‘헌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하늘 나라의 변치 않는 진리이자 근본 원리입니다. 그리고 ‘새것’은 무엇입니까?
그 ‘헌것’의 원리를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이 시대의 하늘을 날게 할 새로운 비행기입니다.
‘헌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새것’은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그저 날개 모양만 흉내 낸 무거운 쇳덩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따로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아니라, 그 비밀을 깨닫기 위해 시간을 내어 주님의 발치에 앉아 씨름하며 묻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이들에게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보석과도 같은 선물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새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옛것’, 즉 복음의 깊이를 제대로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원리를 완벽하게 깨닫기 위한 공부와
묵상, 연구의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도, 삼구도, 뱀도, 미사를 세우신 이유도, 성탄 트리도, 무엇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세상의 변화에 그저 끌려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 안에는 언제나 이런 어둠의 순간에, 옛것의 가치를 깊이 꿰뚫어 새 시대를 연 거인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13세기 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의 시대 교회는 부와 권력으로 스스로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모든 이가 잊고 있던 가장 낡고 오래된 것, 바로 복음의 ‘가난’이라는 먼지 쌓인 보물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는 가난의 핵심 원리를 온 삶으로 묵상하고 살아냈고, 바로 그 지독한 이해를 통해 교회 전체를 쇄신하는 강력하고 새로운 영성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가난이라는 ‘옛것’에서 교회의 미래를 보았듯, 우리도 복음이라는 ‘옛것’에서
세상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참으로 명료합니다.
교회의 미래, 우리 신앙의 미래는 더 화려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보물, 바로 이 복음 말씀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그 핵심 원리를 깨닫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주, 이렇게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성체성사를 온전히 이해하는가?
나는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하는가?
나는 자아가 무엇인지 아는가?
저는 이를 위해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를 집필하였습니다.
냉담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새로운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통 교리에 대한 이해에서 나왔습니다.
먼저 옛것을 이해해야 새로운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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