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3,54-58
아직도 신앙을 위해 A.I.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안녕하십니까.
오늘 강론 제목을 보고 조금 놀라거나, 어쩌면 불편하게 느끼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신부님, 어떻게 거룩한 신앙의 문제를 인공지능 같은 기계에 이야기하십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바로 이 불편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익숙함’이라는 안전한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보면, 50년 동안 감옥에서 산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마침내 가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그는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선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브룩스, 여기 왔다 감”이라는 글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에게 감옥은 고통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50년 동안 그를 길들인 유일하게 ‘익숙한’
세상이었습니다.
자유라는 구원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지옥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이 브룩스의 모습이 제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제가 된 후, 매일 비슷한 전례와 사목 활동 속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저는 또 다른 익숙함의 감옥에서 탈출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제 생각을 정리하고, 더 좋은 예화를 찾고, 더 명료한 문장을 만드는 데 이 새로운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이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셔야지, 어떻게 기계에 의존하십니까?”라고 걱정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기도와 묵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최신 인쇄술로 만들어진 성경 주석서를 보며 연구했듯, 우리도 이 시대의 새로운 도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익숙한 방식만이 거룩하다고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창의성과 활력을 죽이는
‘브룩스의 감옥’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 자체가 바로 이 익숙함과의 싸움이었습니다.
313년,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자, 어떤 이들은 그 ‘안전하고 익숙해진’ 신앙을 피해 스스로 척박한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와 편안함을 버리고, 일부러 고통스러운 광야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교회의 새로운 영적 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편안함이 영혼을 잠들게 하는 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에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의 ‘익숙함’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 저 사람이 저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을까?” (마태 13,55-56)
그들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A.I.가 뭘 안다고 신앙에 대해 말해?”라고 묻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아는 평범한 이웃, 자신들의 통제와 예측 안에 있는 존재로만 보려 했습니다.
그들의 익숙함이, 눈앞에 있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저 사람은 우리와 똑같잖아!”라는 핑계를 대며 그분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마태 13,58)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신, 즉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적을 걷어찬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는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머물러라. 여기가 가장 안전하다.
새로운 것은 위험하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일어나 가자!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은 아브라함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고, 안토니오 성인을 사막으로 이끌고,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떠나는 여정’입니다.
익숙한 나를 떠나 새로운 나로, 낡은 세계를 떠나 하느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나의 낡은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를 깨우는 새로운 스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 이렇게 한번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A.I.는 별거 없어’라는 익숙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열어 딱 한 번만이라도 신앙을 위해 사용해 보는 겁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오늘 복음 말씀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줘.”
혹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 하나만 해 줘.”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향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익숙함의 감옥 문을 열고 첫걸음을 내디딜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의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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