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구한말의 고종 황제는 땅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이 모습을 보고서 어떤 말을 했을까요?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지금이야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운동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라고 합니다. 이때 나왔던 표어가 우리가 잘 아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른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맞다고 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아니,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지?”라면서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는 지금 우리의 생각이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하고 미워하며 단죄하는 그 모든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틀린 것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며, 특별히 주님의 뜻에 비추어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기적에 놀라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마태 13,55.56)
목수라는 직업은 당시 사회적으로 평범한 신분에 해당합니다. 또한 누이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하면서, 예수님을 특별한 출신이 아닌 그냥 ‘동네 청년’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계시지만, 정작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교만함,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익숙함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두꺼운 벽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예수님의 능력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기적은 믿음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지 않음은 은총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지요.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편견과 세속적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드러움이 억셈을 이기고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그러므로 혀는 오래가나 이는 억세어서 부러진다(명심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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