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마태오 14,13-21
찬미를 잘하는 사람은 왜 잘 살까?
저는 가끔 성가대 하시는 분들이 안 하시는 분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왜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까?’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 비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선물을 주고도 마음이 헛헛하고, 무언가 베풀고도 괜히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 ‘주는 기쁨’이 더 크다고 배웠는데, 왜 우리의 나눔에는 이토록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주는 행위’와 ‘진짜 나눔’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상을 기대하며 주는 것은 진짜 주는 게 아닙니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가족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환경을 얻었지만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주는 척, 위하는 척하며 살았지만, 그 영혼의 본질은 주인의 것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었을 뿐입니다.
감사와 찬미가 없는 삶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진짜 나눔이 무엇인지 온 삶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정조 임금 시절, 제주도에 김만덕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천민 중의 천민인 기녀의 신분으로 시작해,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제주 제일의 거상, 오늘날로 치면 여성 CEO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때는 1794년(정조 18년), 제주에 끔찍한 흉년이 들어 길거리에 굶어 죽는 시신들이 즐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김만덕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다 털어 육지에서 쌀을 사 와 도민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 임금님이 너무나 기특해서 김만덕을 한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자, 여러분이 김만덕이라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어요? 평생 먹고살 땅? 높은 벼슬? 저 같아도 귓속말로 ‘이번 새 책,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 많이 팔리게 해 주세요…’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김만덕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소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사옵니다.
부디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하게 해 주시옵소서.”
돈도, 벼슬도 아닌 금강산 유람이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녀의 마음에는 ‘결핍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음에 기뻐하는 영혼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풍요로웠기에, 나눔에 대한 보상으로 다시 물질을 채우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큰 명예와 기쁨을 얻게 되었죠.
저에게도 이 ‘결핍감’이라는 것이 가장 큰 영적 싸움이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감이 컸습니다.
‘나는 가정을 꾸리는 기쁨을 포기했으니, 주님께 더 많이 드리고 있고, 신자들에게 더 많이 희생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내 사그라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피어난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피정에서 찬미를 할 때였습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이 가사들이 무심코 들어왔는데 그때 길 잃고 헤맬 때 빛을 보았던 것처럼 다시 빛을 본 느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찬미가 기도가 됩니다.
찬미로 느꼈던 그 충만함의 느낌.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억지로라도 성막을 짓고 매일 감사의 제사를 바치게 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 감사와 찬미라는 ‘영적 훈련’이 없다면, 한 번만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결핍의 감정을 극복하고 감사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찬미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사촌이자 동료였던 세례자 요한이 끔찍하게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계셨죠.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수만 명의 군중을 앞에 두고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마태 14,17)라고 말합니다.
상황 전체가 ‘결핍’이라는 검은 천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슬픔의 결핍, 물질의 결핍.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으십니다.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고기를 받아 드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슬픔과 결핍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감사와 찬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기적의 스위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에우카리스티아)가 없었다면, 빵 다섯 개는 그저 한두 명의 허기를 달래는 것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미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되었을 때, 그것은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찬미와 풍요의 법칙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납니다.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노래가 있지요.
이 아름다운 찬미를 지은 존 뉴턴은 처음부터 거룩한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노예 상인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고통 속에 밀어 넣으며 살았던,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극적으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합니다.
자신의 끔찍한 죄를 눈물로 회개하자,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위대한 찬미가 된 것입니다.
유명해지려고 쓴 곡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흘러넘쳐 저절로 나온 찬미였고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찾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텅 빈 지갑이 아니라, ‘결핍의 감정’ 바로 그것입니다.
찬미를 잘하는 사람이 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찬미가 바로 감사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결핍의 감정을 없애주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조건 없이 은총을 받았음을 알기에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감사하며 나눌 줄 아는 마음에 더 큰 축복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설거지할 때, 운전할 때 차 안에서 찬미를 틀어놓고 따라 불러 보십시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기다릴 때,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자투리 시간을 찬미로 채워보는 겁니다.
완벽하게 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작은 흥얼거림이, 낮은 읊조림이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의 소리를 잠재우고, 항상 내가 베푼 것의 수십 배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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