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마태오 19,23-30
낙타가 바늘귀 실처럼 가늘어지는 유일한 방법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안도하며 생각합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늘 우리는 이 ‘바늘귀’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바늘귀는 재산 심판대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자유도(自由度)’를 측정하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늘귀를 통과한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언제든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에 묶여, 저 좁은 자유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영혼이 바로 ‘낙타’와 같은 부자입니다.
19세기 미국에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린 헤티 그린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대 세계 최고의 여성 갑부였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찬 오트밀을 먹었고, 닳아빠진 검은 옷 한 벌로 평생을 버텼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아들 네드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면 될 일이었지만, 헤티는 병원비를
내지 않기 위해 몇 시간이나 아들을 데리고 무료 자선 병원을 찾아 헤맸습니다.
결국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아들의 다리는 괴사했고, 평생 다리를 절단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아들의 다리 하나를 위해 돈을 쓸 자유가 없었던 어머니.
그녀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아들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의무마저 저버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영혼이었습니다.
헤티 그린은 왜 그렇게 비참해졌을까요? 그녀는 돈을 지키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됩니다.
그 쇠사슬에 묶인 영혼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못합니다.
여기,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76년, 구소련의 수영 챔피언이었던 샤바르슈 카라페티안. 어느 날 그의 눈앞에서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호수로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집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심 10미터 아래에서 2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챔피언의 경력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신문에는 장비 탓하며 한 명도 구하지 않은 구조대원들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누가 구조한 게 뭐가 중요해요. 사람들이 산 게 중요하지.”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자유롭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늘 겸손했지만, 우리는 그의 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국가 신앙으로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순교자들의 후예였습니다.
샤바르슈의 할아버지 역시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터키인 이웃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분이었습니다.
‘이웃의 희생으로 내가 존재한다.’라는 이야기는 그의 가족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유산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순간 어떤 기도를 바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몸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랑의 정신, 그의 핏줄과 영혼에 1,700년 넘게 새겨져 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그의 온몸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답은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팔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중요한 명령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우리의 자유는 ‘무엇을 버리는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따르는가’에서 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자기 손에 쥔 과자를 옆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나눠줍니다.
왜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 뒤에 과자 한 봉지를 통째로 들고 있는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부모와 함께 있기에, 아이는 결핍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재물과 명예,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따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온 세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내 손에 쥔 작은 것을 더 이상 움켜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것에 묶인 낙타가 아니라, 언제든 저 자유의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바람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그가 복수심에 불탈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백인들을 용서하고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가장 부자유한 공간에서,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장 위대한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심 받은 자유는 바로 이 ‘만델라의 자유’입니다.
돈과 명예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내 안의 미움과 원망,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한순간에 얻어지지 않으며 평생에 걸친 영적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말합니다.
“나는 잊지는 않지만, 용서합니다.”
그는 이 자유를 위해 끝까지 자신과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엔 어제와 마찬가지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끊임없이 내가 가진 반죽과 기름을 조금씩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연습을 매일 할 때 엘리야를 맞아들여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찾은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만델라는 말합니다.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연습들이 쌓일 때, 우리는 마침내 저 좁은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2코린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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