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20,1-16
저 사람이 저토록 기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 뭘까?
오늘 우리는 교회 역사 안에 큰 족적과 위업을 남긴 대 성인 한분을 기억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1091~1153)입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들이 붙습니다.
‘꿀처럼 달콤한 박사’(Doctor mellifluus), ‘마지막 교부’ ‘교황 및 왕들의 자문가’ ‘명 설교가’ ‘대저술가’ ‘트라피스트 수도회 제2의 창립자’...
따뜻하고 사랑 많았던 신앙의 모델 어머니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난 후 베르나르도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어머니와의 사별은 그를 더 깊은 영적 생활로 인도했고, 마침내 그를 수도생활로 안내했습니다.
1113년 23세 되던 해, 베르나르도는 시토회에 입회하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베르나르도 혼자 입회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해 뜻을 같이 하는 총 31명의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시토회는 당시 기강이 해이해진 수도회와는 차별화된 수도회로 베네딕토 규칙을 보다 철저히 준수하기 위해 1908년 성 노르베르토에 의해 창설된 트라피스트 수도회였습니다.
이 수도회는 엄격한 생활로 유명했습니다.
빵과 채소로만 연명했으며, 육식을 금했습니다.
하루 6시간의 기도와 6시간의 수면,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강도 높은 육체 노동에 종사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견디지 못한 수도자들이 하나 둘, 수도원을 떠났고, 엄청 빡세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중에는 입회자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스테파노 하르딩이라는 원장이 좋은 지원자를 보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그 순간 베르나라도가 31명의 청년들을 몰고 우르르 들어오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베르나르도는 트라피스트회의 엄중한 규칙을 충실히 준수했을 뿐 아니라 일부러 고행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책상 앞에 작은 글귀 하나를 라틴어로 써붙여 놓고 매일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 하러 여기 왔느냐?”(Ad quid venisti?)
수도자로서 베르나로도의 탁월성은 즉시 주변 사람들 눈에 띄었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라 수도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중에 그가 개척한 클레르보 분원의 수도자 수는 700여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강론와 저술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저함없이 그를 살아 있는 성인이라 불렀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에게는 처절할 정도로 엄격했지만, 동료 수도자들이나 제자들에게는 따뜻한 봄바람처럼 다정다감했습니다.
한 번 씩 외부 강의를 나갔다가 수도원으로 귀원할 때, 그는 혼자 돌아오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품과 영성에 매료된 지원자들을 몇 명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베르나르도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사제 수도 성소 급감 현상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한명 한명이 보다 영성적이고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 생활, 수도 생활을 기쁘고 행복하게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반드시 고민을 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얼굴이지?
저들을 저렇게 기쁘고 충만한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과연 무엇이지? 한번 저분이 머무시는 곳으로 나도 한번 따라가 볼까?
이런 과정에서 성소가 싹트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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