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마태오 22,1-14
혼인 예복: 빚진 자의 마음
찬미 예수님!
며칠 전에 어떤 다른 교파의 신자 한 분이 면담을 청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다니던 두 곳의 교회에서 모두 쫓겨났고, 이제는 가톨릭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고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그런 마음 상태로는 저희 성당에 나오셔도 누구와도 섞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특별한 계시를 받는다고 믿었고, 자신이 보는 환시나 꿈을 완전한 사실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어둠’으로, 오직 자신만을 ‘빛’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 어둠을 쳐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었으니, 교회 처지에서는 자신들을 사탄 취급하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벗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못 하였다.”
그렇습니다. 그가 쫓겨난 이유는 단 하나, 합당한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옷은 값비싼 비단옷이 아니라, 그 잔치에 있는 다른 모든 이들과 기쁘게 어울릴 수 있는 준비,
바로 ‘겸손’이라는 마음의 예복입니다.
혼자만 빛이고 다른 사람은 어둠이라는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겸손이라는 예복은 어떻게 입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길거리로 종들을 보내 “악한 이들이나 선한 이들이나 만나는 대로” 모두 잔치에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길거리에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이, 오직 주인의 자비로 이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게 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에 빠집니다.
‘주인이 손님이 없어 곤란했는데, 우리가 와서 자리를 채워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주인이 우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준비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낡고 더러운 옷이 가장 멋진 옷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페르시아의 옛 우화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눈 속에서 얼어 죽어가는 뱀을 발견하고, 불쌍한 마음에 자신의 품에 넣어 온기로 살려줍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린 뱀은 온기를 되찾자마자 자신을 살려준 나그네를 물어버립니다.
죽어가던 나그네가 “왜 나를 물었느냐?”고 묻자, 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감사하지 않는 영혼은 뱀과 같습니다.
그 영혼은 끊임없이 불만을 자아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그랬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음에도, 그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불평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인 의사 히사마츠 긴이치는 ‘신의 발’이라 불리며 40년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자신은 낡은 진료소에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왜 이토록 힘든 일을 평생 계속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저를 살려준 것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나눠준 피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생명의 빚’을 평생 갚으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입어야 할 혼인 예복,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신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해드리는 시혜가 아닙니다.
길거리의 먼지 같은 우리를 불러주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갚을 길 없는 은혜의 빚을, 기쁨으로 갚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이 마음으로 봉사할 때, 우리의 봉사는 결코 지치지 않는 기쁨의 축제가 됩니다.
아르스의 본당 신부였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이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학습 능력이 부진하여 사제품을 받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제로 불러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 16시간 이상을 고해소에 앉아 수많은
영혼들을 돌보았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그의 성덕을 보러 몰려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르스로 오려고 하지만, 아르스에는 죄인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봉사를, 자격 없는 죄인을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어제 90세로 돌아가신 루치아 자매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며느리가 세례를 받고 아들이 그 며느리와 혼배미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정상 며느리가 세례를 받지 않으면 둘은 교회법상 혼배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교리를 이후에 받는 조건으로 며느리에게 세례를 주고 혼배까지 시켜드렸습니다.
고인은 의사가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성당에 나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기뻐하셨습니다.
정말 돌아가시기 직전의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동안 온갖 봉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아직도 하느님께 가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장례미사 당일에 후손 1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고인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 열심히 살아도 그분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뭔가 내가 그분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져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끝까지 혼인 예복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숨이 멎는 그 날까지 일해도 합당하지 않다는 마음으로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이 작은 감사의 연습이, 우리를 교만한 손님이 아닌 겸손한 자녀로 만들어주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8)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