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마태오 22,34-40
왕후가 되거나, 원수가 되거나!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여왕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를 기념합니다.
혹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하늘의 모후라고 칭하는 것을 못마땅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냥 훌륭한 인간이지, 천상에서 여왕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성모님처럼 당신의 모후가 되게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오늘 방법에서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가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 즉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가르침과 성모님의 ‘모후’ 기념일이 같은 날에 만나는 것은 우연일까요?
교회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왕, 진정한 여왕을 만드는 것은 혈통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두 가지 사랑’을 얼마나 온전히 살아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은 임금이시니, 그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칭호가 부여되는지 살펴봅시다.
세종의 아내, 소헌왕후입니다.
그녀의 삶은 시작부터 눈물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앞에서,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어머니와 친족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갓 즉위한 남편 세종을 향해 신하들은 소리쳤습니다.
“전하! 역적의 딸을 어찌 국모로 삼으시려 하나이까! 당장 폐위하소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죽여 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했다 해도 누구도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습니다.
그녀의 ‘임금 사랑’은 이 모든 비극과 고통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세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전하의 어깨에는 이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으니, 부디 저의 일로 옥체를 상심하지 마옵소서.
신첩은 전하의 아내이자, 이 나라의 국모이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피눈물을 삼키고, 남편이 한글 창제와 같은 위대한 업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궁궐의 안정을 완벽하게 책임졌습니다.
이 위대한 첫사랑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사랑으로 흘러넘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에 갇혀있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삶을 돌보았습니다.
궁궐의 여인들에게 직접 누에치기를 가르쳐 길쌈을 장려하고, 그 생산물을 백성들의 살림에 보탰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안위보다 동족을 위해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라고 외쳤던 에스테르 왕비와 같았고, 빵이 장미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했던 엘리사베타 성녀의 사랑과 닮아있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세계 역사에 남은 왕후들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드님을 세상 구원을 위해 바치시기까지 하셨는데, 하늘의 모후라고 불리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요?
우리는 누구나 하늘의 모후가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면 어떨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것은 모후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세상에 살 자격까지 잃게 됩니다.
모후가 되지 않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살 자격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내린 궁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임금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마침내 아들을 낳아 국모의 자리에 오른 기쁨과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그녀가 바로 희빈 장씨입니다.
그녀의 첫 번째 사랑, 즉 ‘임금 사랑’은 불꽃처럼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나라의 안녕을 비추는 횃불이 아니라, 모든 정적을 불태우려는 질투의 화염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런 속삭임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 것이어야만 해. 이 권력, 이 아들,
이 나라의 미래가 모두 나의 것이 되어야 해!’ 이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의 발현이었습니다.
이 왜곡된 첫사랑은 끔찍한 두 번째 사랑의 실패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백성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끝없는 피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정적인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그녀의 질투는 극에 달합니다.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처소 깊숙한 곳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의 모습을 한 인형에 밤낮으로 화살을 쏘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말입니다.
구약의 이자벨 왕비가 아합 왕을 타락시켜 무고한 나봇의 피를 흘리게 하고 포도밭을 빼앗았던 것처럼, 희빈 장씨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나라의 기강을 흔들고 공동체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사랑은 한 나라를 품는 사랑이 아니었기에, 차가운 사약 한 사발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늘의 왕후가 된다는 것은 교만이 아닐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했던 성녀 베르나데트는, 훗날 수녀원에 들어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며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한 수녀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성모님을 직접 뵌 사람으로서, 교만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요?”
그러자 베르나데트 성녀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제가 왜 교만해져야 하죠?
성모님께서는 저를 그저 ‘빗자루’처럼 사용하셨을 뿐이에요.
청소가 끝나면, 빗자루는 다시 문 뒤에 놓이는 법이랍니다.”
성모님도 당신이 이룬 위대한 업적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지 않고, 모든 것을 “전능하신 분께서 저에게 큰일을 하셨으니”(루카 1,49)라며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오히려 모후가 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려면 성모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소헌왕후가 왕후가 되기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요?
임금을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로 여기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