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 누가 취미를 물으면 ‘영화감상’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실제로 중고등학생 때 시간이 나면 무조건 극장에 갔고, 돈이 부족할 때는 동시상영 극장에 갈 정도로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현재는 극장에 가게 되면 함께 간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코를 골며 잡니다. 이렇게 잠을 푹 자고 오니, 영화 보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안 간지가 벌써 15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그리고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하지 않았던 공부에 충실하면서 많은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다가 찰스 다윈의 고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서른 즈음만 해도 문학, 그림, 음악 등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학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좋아했던 취미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정신은 그저 온갖 사실을 분쇄해 그곳에서 일반 법칙을 끄집어내는 기계가 된 것만 같다. 미적 감각을 관장하는 뇌의 한 부분이 왜 퇴화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삶을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짧게라도 시를 읽고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음악을 들을 것이다. 진작 그렇게 했다면 그 방면에서 퇴행된 뇌가 건강하게 유지되지 않았을까? 심미적 취향을 잃은 것은 단지 즐거움을 잃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도덕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무디게 만드는 탓이다.”
행복한 사람은 후회를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집중하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 복음은 세레자 요한의 순교를 전해줍니다. 헤로데는 당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갈릴래아 지역을 다스리던 왕인데,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합니다. 이를 세례자 요한이 공개적으로 꾸짖습니다. 그리고 투옥되지요. 여기서 특이한 점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알고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의 생일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큰 환심을 사게 되었고, 헤로데는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과도하게 맹세합니다. 권위를 과시하는 모습입니다. 이때 요구했던 것이 ‘세례자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데는 자기 체면 때문에 살인을 명령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무엇이 옳은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과 약속 때문에 악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는 나중에 나오지만, 예수님의 출현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 압력과 체면 때문에 악을 선택한 결과는 고스란히 자기의 불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후회할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