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애완견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만 있으니 외로워 보였는데, 마침 친한 친구가 애완견 한 마리 더 키워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양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입양한 그 조그만 애완견이 먼저 있던 애완견에게 사납게 대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재롱을 부리면서 ‘예쁨’ 받지만, 먼저 온 애완견만 보면 사나운 개로 변신했습니다. 항상 싸우니 같이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따로 방을 만들어 주고, 서로 만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야 집이 평화롭기 때문입니다.
애완견을 준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싸우게 놔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친구의 말을 듣고 다시 이 두 마리를 같이 있게 하자, 역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나중에 온 강아지가 지면서 서열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뒤로 전혀 대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들 때가 많지 않나요? 왜 이런 시련과 아픔을 주시느냐고, 왜 정의롭지 못하시냐고, 정말로 사랑 그 자체인 분이 맞냐고 대듭니다. 이렇게 대드는 이유는 앞서 애완견들이 서열 다툼을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자기 밑 서열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아는 사람은 절대 대들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까불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시고, 또 명령하신 겸손의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당시 식사 자리는 사회적 명예와 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자리인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경쟁하곤 했지요. 이 모습을 보시고 “윗자리에 앉지 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면서 겸손한 이를 오히려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유다 사회에서는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을 초대해서 서로 보답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세속적인 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부정한 이들’로 취급되는 사람으로, 보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으로 보답할 수 없는 사람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 진정한 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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