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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3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9-03 조회수 : 93

복음: 루카 4,38-44 

 하느님 종중의 종! 

  

그레고리오 교황님(540-604)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던지 이름 앞에 대(大)자를 붙입니다.

성인 중의 대 성인, 교황님 중에 대 교황님으로 불릴 만큼 교회사 안에 그분이 남긴 족적이 정말 탁월합니다.

그는 얼마나 명석했던지 서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540년경 로마에서 출생합니다.

그의 가문은 정말 대단한 귀족 가문인 동시에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혈통만 훌륭한 귀족 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측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던지 교황님을 두 명(펠리체 3세 교황, 아가피토 교황)이나 배출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 고르디아누스와 어머니 실비아는 마치 성인 성녀처럼 살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실비아는 성인품에 올랐으며, 아버지 는 그레고리오가 태어난 후 성직자의 길을 택할 정도였습니다.

두 고모 에밀리아나와 타릴리아는 평생 동정을 지키면서 열심한 기도와 고행을 통해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법학공부를 시작한 그레고리오는 572년 공부를 끝내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로마의 고위직에 임며명됩니다.

당시 시국은 어수선하기가 극에 달했고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당시 그레고리오가 직면했던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해나가기 위해 흘렸던 땀은 그가 나중에 교황직을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로마에서의 높은 직책은 그레고리오를 결코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첼리오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오가 체험했던 짧은 수도 생활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중에 선물로 받았던 소중한 하느님 체험,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가운데 얻었던 충만한 기쁨과 희열, 열정적인 기도 분위기는 그가 나중에 수많은 사목적 걱정거리들을 껴안고 살아야 했던 교황 시절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꿈결같이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였습니다.

펠라지오 교황님은 그를 부제로 서품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황대사로 파견합니다.

그곳에서 로마와는 사뭇 다른 비잔틴 문화를 이해해가면서 열정적 사목 체험을 해나가던 그레고리오였는데,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교황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당신의 비서로 임명합니다. 

 

그레고리오가 로마에 도착하던 즈음 정말 특별한 난관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 엄청난 폭우가 계속 퍼부었습니다.

강이 범람했고 수많은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페스트까지 창궐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는데, 그 가운데 교황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펠라지오 교황님도 페스트에 걸려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러자 즉시 그레고리오를 후임 교황으로 임명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레고리오는 이리저리 도망까지 다니며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백성들의 요구를 마냥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교황직을 수락하고 590년 교황좌에 오릅니다. 

 

착좌하자마자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즉시 사목에 뛰어듭니다.

사회 일이건 교회 일이건 상관하지 않고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수많은 일들을 척척 해나가셨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쇄신을 위해 800여 통이나 되는 사목서한을 썼습니다.

각 교구 주교들이나 사제들, 아빠스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수시로 전문가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교황님께 편지를 썼고 교황님은 매일 수많은 질문들과 산적한 고민거리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지혜로운 평화의 전도사였습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디아, 이탈리아 사이 미묘한 신경전, 실제적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그들을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 형제적 친교, 평온한 동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의 회개, 여러 유럽 국가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수많은 이교도 백성들은 교황님에게 있어 끊임없는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사목적, 신앙적, 영적 측면에서의 아버지이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사회 변화, 사회 개혁의 주인공이셨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는 걱정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지나친 일과 일상적 과로로 인해 교황님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갔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리오 교황님의 식탁에는 매일 12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항상 초대되었습니다.

사목자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목활동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항상 ‘하느님 종중의 종’이라고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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