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1-5
참 신앙인이 되는 유일한 길: 그리스도의 제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거대한 군중을 향해,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러 오신 분께서 ‘미워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것은 문자 그대로 부모를 증오하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단 하나의, 타협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순위를 정하라는 뜻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심을 느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반대하셨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지만, 주님의 부르심보다는 위에 둘 수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버지의 뜻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의 우선순위는 ‘자기 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필름 카메라의 제왕, 코닥(Kodak)’을 생각해 봅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이름표는 ‘필름의 왕’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표를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했다면, 디지털카메라라는 새로운 기술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필름의 왕’이라는 낡은 이름표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괴할지 모르는 미래를 미워했고, 결국 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를 인정하지 못해, 2012년 파산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종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군단의 창설자’라는 거룩한 이름표를 달았던 사제, 마르시알 마시엘 데고야도입니다. 그는 20세기 가톨릭교회에서 살아있는 성인처럼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름표 뒤에는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신학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했고, 심지어 여러 명의 여성과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까?
그분을 스승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는 아마 “나는 그리스도의 군단을 이끄는 사람입니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런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낡은 이름표들을 미워하고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이름표 앞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를 먼저 붙이는 것입니다.
경상남도 진주에는 ‘남성당한약방’이라는 작은 한약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주인인 김장하 선생은 평생을 ‘가난한 학생들의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수백억 원의 돈을, 단 한 푼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모두 가난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그의 청빈은 지독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낡은 자전거로 출퇴근 했고, 흔한 자가용 한 대 없이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진주의 부자’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실천한 정의였습니다.
그의 장학금을 받고 성장한 수많은 아이들 중 한 명이 바로 문형배 헌법재판관입니다.
그는 판사가 된 후에도 늘 김장하 선생을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는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았던 날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저희들에게는 ‘어른’이셨습니다.
돈만 주는 그런 분이 아니고… 그 돈을 받으면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나도 저분을 닮은 삶을 살아야겠다.’
그걸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냥 장학증서만 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너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향을 심어주셨어요.”
그는 평생 ‘김장하의 제자 재판관’이라는 이름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복을 입고도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스승이 보여주었던 정의를 실현하는 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의 제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세속적 욕망을 ‘미워하고’ 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탑을 세우거나 전쟁을 하기에 앞서 비용을 계산해보라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 영광스러운 이름표를 지키기 위해, 과연 내가 그토록 아끼는 세상의 낡은 이름표들을 기꺼이 ‘미워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계산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는 우리에게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헨리 8세의 깊은 신임을 받던,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이혼을 위해 교회를 거스르려 하자,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헨리 8세의 충신’이라는 이름표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표를 지킬 것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했고,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그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으로서는 먼저입니다.
(I die 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우리에게 세상 모든 이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온전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의 이름표들 앞에 “그리스도의 제자”를 붙여봅시다.
알베리오네 복자께서는 “스승 예수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야 잘못된 길로 빗나가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이 있다면, 당당하게 고백합시다.
“나는 많이 부족하고 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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