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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9-10 조회수 : 153

루카 6,20-26 

 

행복과 불행? 원리는 사랑이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엎는, 충격적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아니, 어떻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이 왜 불행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세상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설적인 진실을 두 사람의 삶을 통해 똑똑히 목격하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세상의 모든 부와 쾌락, 명예를 손에 쥐었던 남자, 바로 플레이보이 제국의 창시자 휴 헤프너입니다.

그는 수십 개의 방이 딸린 호화로운 저택에서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평생을 잠옷 차림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쾌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어땠을까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깊은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이 누렸던 모든 쾌락의 잿더미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평생을 울며 살았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칭송받는 프랑스의 에디트 피아프입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가난, 질병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연이은 죽음과 배신, 그리고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 찬 ‘우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노래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고통을 넘어,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휴 헤프너와 에디트 피아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가 더 행복했습니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유일한 행복의 길이지만, 대부분 길을 잃고 맙니다.

세속-육신-마귀라는 삼구(三仇)에 사로잡혀, 가장 중요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행려인들의 어머니셨던 ‘왕초 수녀님’, 최 소피아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수녀님은 ‘세속’, 즉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요셉의 집’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행려인들을 돌볼 때,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날로 필요한 것을 모두 사서 나누어주고 통장을 텅 비워버리셨습니다.

어느 날, 한 방송국 PD가 인터뷰 중에 “수녀님, 내일은 당장 쌀이 없는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느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예. 오늘 필요한 만큼 주셨으니, 오늘 감사하며 쓰면 됩니다.”

그녀에게 돈은 쌓아두는 재산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흘려보내는 강물과 같았습니다. 

 

둘째, 수녀님은 ‘육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KBS의 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수녀님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는 욕을 하며 거칠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수녀님의 얼굴은 할퀴어져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며 그를 씻기고 먹였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몸은 아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셋째, 수녀님은 ‘마귀’, 즉 세상의 인정과 명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셨습니다.

한번은 조계사의 한 스님이 수녀님의 헌신적인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불교 방송을 통해 수녀님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후원금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녀님은 스님을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스님! 왜 제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제가 하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 아시면 됩니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세상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시선 앞에서만 살았던 분입니다.

이처럼 삼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기에,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그녀는 진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행려인들에게 욕을 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야단과 매질 속에, 뼈 속까지 시린 진짜 ‘사랑’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말하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직후, 그 전 재산을 익명으로 형제들과 예술가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수도원의 정원사, 병원의 잡역부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이름 없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돌보던 부인에게 그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

그는 세상의 모든 부를 버렸지만, 그 대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만족과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행복합니다.

삼구를 사랑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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