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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9-11 조회수 : 143

루카 6,27-38 

 

용서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그러나 받았음을 기억하지 못하면 가진 게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장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형제자매 여러분, 마음속에 ‘원수’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내 삶을 망가뜨린 사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 명령 앞에서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집니다.

‘주님, 다른 것은 다 하겠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상대를 판단하고 미워하는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한때 ‘원수’였다는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도 용서받았음을 기억해낸다면 ‘양심상’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한때 부모의 원수였습니다.

부모님께 아무것도 드리는 것 없이, 그분들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습니다.

이 기억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자신이 가진 것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용서받은 기억이 없다면, 나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한 유다인 남자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 비젠탈,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치 사냥꾼’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중, 한 간호사에 의해 어떤 병실로 불려 가게 됩니다.

그곳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어가던 21살의 나치 SS 친위대 병사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비젠탈의 손을 잡고 자신의 끔찍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한 마을의 유다인들을 건물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했으며, 불타는 집에서 뛰어내리는 한 가족에게 총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나는 이제 곧 죽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유다인이니, 당신에게만이라도

용서를 받고 죽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젠탈은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사의 손을 뿌리친 채 병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포기했습니다.

평생을 나치 사냥꾼으로 살다가 훗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바라기』라는 책을 썼고, 전 세계 지성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를 용서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기, 비젠탈과 똑같은 지옥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마퀼레 일리바기자,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생존자입니다.

그녀는 후투족 학살자들이 칼을 들고 “바퀴벌레들을 찾아 죽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좁디좁은 화장실에 다른 일곱 명의 여인들과 함께 91일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녀가 사랑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오빠는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살인자들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옥 같은 화장실 안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쥐여주셨던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묵주기도를 바쳤고, 기도가 깊어질수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작은 거짓말들, 이웃에 대한 이기적인 마음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학살자들의 죄는 헤아릴 수 없이 크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나의 작은 죄 또한 용서가 필요한 죄이구나.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용서해주시는데, 내가 뭐라고 감히 저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녀 안에 ‘용서받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은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이 자녀에게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고, 신앙인에게는 성찬례입니다.

미사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 신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용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언 추기경님은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간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그중 9년은 독방이었습니다.

그를 가두었던 간수들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단 하나 빼앗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사를 봉헌하려는 그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몰래 넣어준 포도주 몇 방울을 감기약 병에 담고, 작은 빵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얹어, 매일 밤 자신의 손바닥을 제대 삼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매일 밤, 성찬의 말씀을 통해 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 손바닥 위의 빵 부스러기는 저에게 ‘살아있는 제대’가 되었습니다.

그 제대 위에서 저의 모든 고통과 미움은 예수님의 고통과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가둔 간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는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용서가 나의 용서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는 기적의 장소입니다.

저도 미사 안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듣고 미워지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미사의 힘, 용서받은 기억이 한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분이 바로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어머니, 아순타 고레티입니다. 

 

1902년, 그녀의 열한 살 난 딸 마리아가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 세레넬리에게 순결을 지키려다

열네 군데나 칼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용서 힘은 며칠 전에 했던 첫영성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순타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녀에게 알레산드로는 평생을 증오해도 모자랄

원수였습니다.

수십 년이 흘러, 알레산드로는 27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성탄 전야, 그는 마리아의 고향 마을 성당을 찾아가, 미사에 참례하러 온 늙은 아순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아순타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 마리아가 너를 용서했고,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지 않겠느냐?”

용서는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온 마을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딸을 죽인 그 원수의 팔을 잡고 함께 제대 앞으로 나아가 나란히 성체를 모셨습니다.

성체 안에서, 그녀와 알레산드로는 ‘피해자의 어머니’와 ‘가해자’가 아닌, 똑같이 용서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도 용서가 안 되면 더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만큼 용서받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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