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저의 손톱을 무심코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꽤 기네. 깎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 일주일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자란 것입니다. 제 몸의 일부인 손톱인데 말입니다.
아이들 크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2년 전, 우리 본당에 부임해서 처음 만났던 복사 아이들은 분명히 저보다 작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중학교 올라가면서 지금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나의 몸도 또 남의 몸도 잘 모릅니다. 이것만 모를까요? 그 밖에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 안에 살 때가 참 많습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으니 세상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하느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만 있으면 그만이고 그것이 행복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겸손 안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야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행복 선언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우는 이, 박해받는 이에게 주어지는 약속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것이고, 불행 선언은 부유한 이, 배부른 이, 웃는 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이에게 내려지는 “불행하다”라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반대로 이야기하시지요. 세상의 질서를 뒤집으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약한 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의 눈으로 불행해 보이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상에서만 즐거움과 위로를 찾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돌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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