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에 대해 이러저러한 질문이 던져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이미 제기되었던 질문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제후였던 헤로데(안티파스: 기원전 4년 – 기원후 39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루신 행적들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로데는 개인 정보원들을 통해 널리 전파되어 있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상호 엇갈린 상태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문들 가운데 어떤 소문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예수라는 이 기이하고 역설적인 인물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하는 이러한 질문들이 헤로데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갈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합니다. 군중 심리는 가급적이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호기심을 끄는 쪽으로 쏠리곤 합니다. 때로는 선정적이며 자극적인 소문에 귀를 더 기울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이러한 소문에 부채질을 하신 분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군중은 가르침과 행적의 의도와 목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 충족만 갈구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둘러싼 이 모든 소음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요한 세례자를 처참하게 살해한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마음속 깊이 처박아 두고 잊으려 해도 늘 가슴을 짓눌렀던,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 사람입니다(마르 6,20 참조).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경비병을 보내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 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분의 이 참된 신원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헤로데처럼, 신앙이 주는 어려움과 이 어려움이 요구하는 세속적 포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겸허한 마음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갖은 혼란과 맞서 싸울 도전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겸허한 마음으로 도전하여, 우리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며 전하는, 가슴 벅찬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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