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47-51
왜 우리는 믿는 데도 불안할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천사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 대천사님들은 각자의 역할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날라다 주는 존재입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수호하며 정의를 세우고,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라파엘 대천사는 우리를 치유하고 동반합니다.
이 모든 천사의 역할은 결국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다니면서도, 왜 여전히 불안하고 평화롭지 못할 때가 많을까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충분히 내려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속에 천사가 내려올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어렸을 때 재래식 화장실 밑으로 채변봉투를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그곳으로 누가 선뜻 손을 내밀겠습니까?
그곳에 손을 넣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제가 학교에 가서 혼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지저분한 곳으로 손을 내려 채변봉투를 올려주셨습니다.
왜 아버지는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그 채변봉투 안에 '저의 것'이 들어 있었고, 저라는 '소중한 것'이 그 속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속에 저의 것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똥이 있는 곳으로 손을 넣을 필요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은총'의 원리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조각, 곧 그분의 아드님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으로 은총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의 조각'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당신의 피가 섞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흘려진 곳', 곧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단이 만들어지고, 그 무덤 위로 천사들이 평화와 은총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이신 아드님을 우리 마음속에 '무덤'이 되게 하시고 그 속에 묻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사를 통해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에 천사가 앉아 있었다고 요한 복음은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에 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는 머리맡에 다른 하나는 발치에 있었다." (요한 20,12)
천사는 아무 데나 앉을 수 없습니다.
천사는 오직 하느님의 아드님, 곧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조각이 묻힌 그 거룩한 무덤 위로만 내려와 평화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가 섞인 곳에 은총이 내린다'는 진리는 우리 시대의 성인,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통해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의사라는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멀리 아프리카 수단 톤즈로 건너간 그는, 한센인들의 고름을 직접 짜주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피와 땀은 톤즈의 메마른 땅과 그곳 주민들의 고통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톤즈 사람들을 품었고, 그들의 삶 속에 자신의 '피'를 깊이 섞었습니다.
그런 이태석 신부님이 암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수단 톤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암 투병 중에도 그의 마음은 왜 그곳을 향했을까요?
그는 "우물을 만들러 다시 톤즈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곳, 톤즈에 당신의 피와 땀, 그리고 영혼이 너무나도 많이 흘려졌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당신의 '피가 섞인 무덤'과 같은 자리였고, 그 무덤을 통해 하느님의 평화와 은총이 쏟아져
내리기를 갈망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깊이 피 흘린 곳에 가장 큰 평화가 임합니다.
우리 안에 이 무덤을 가졌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조각, 곧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무덤'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무덤만 있으면 될까요?
무덤은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자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분의 죽음을 묵상하고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갔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마음속 깊이 품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무덤'을 자신 안에 만들었기에, 가장 먼저 평화의 소식과 부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상들이 3년 상을 치렀던 것처럼, 돌아가신 부모님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그 아픔을 품는 것이 효의 도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얻고 싶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무덤'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 무덤을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십자가의 길이나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 15기도 등을 매일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분의 고통을 내 마음의 무덤에 새길 때, 우리는 그분의 피에 동참하고 그분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무덤을 만드는 이는 그 무덤 위로 평화의 천사들이 내려와 항상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