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51-56
내가 감정변화가 너무 잦다면?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9장 51-56절을 통해 예수님의 참으로 인상 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하루로 치자면 저녁, 곧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잠이 죽음과 같듯이, 예수님은 당신 삶의 마지막,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목적을 향해 단호히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하셨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그들은 작은 일에 쉽게 분노하고, 감정에 휩쓸려 무모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이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룻동안 얼마나 자주 작은 일에 감정의 노예가 되고, 일희일비하며 평화를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강론을 통해, 우리가 하룻동안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예수님처럼 의연하게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남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것이며, 정치 경력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앞날이 창창했던 한 청년의 꿈과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그를 덮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만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루스벨트는 여기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미국 국민을 위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굳건한 신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강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작은 사람들을 위한 큰 정부'라는 명확한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로 고통받으며 스스로 약자의 입장을 경험한 것이, 그를 더욱 확고하게 '모든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정부'라는 대의명분에 헌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위기 극복과 국민의 삶 안정'이라는 명확한 최종 목적을 향해 의지를 굳건히 하며
흔들림 없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수많은 비난과 역경에 직면했지만,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이나 당장의 언론 비판, 정치적 공격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국민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불편함에 휩쓸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고통과 외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정을 통제하고 나아간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명확하고 굳건한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일의 감정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 27년간의 긴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함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도 분노나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틈틈이 공부하고 운동하며 '자유로운 남아공의 대통령'이라는 확고한 최종 목적을 향해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그가 출소 후 자신을 억압했던 간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적인 복수심보다 '남아공의 화합과 용서'라는 더 큰 대의명분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굳건한 의지는 당장의 감정을 초월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노인이 된 라이언이 전우들의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묻습니다.
"나... 잘 산 것 같아?"
그리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평생을 고생하며 가족을 위해 살다가 늙어 아버지가 입던
옷을 껴안고 독백합니다.
"아버지... 저 잘 살았죠? 그런데 억수로 힘들었어요..."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묻고 답합니다.
그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라고 하신 말씀과는 다르지만, 그들 나름의 충실한 삶의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마지막'이 있었기에, 그들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당장의 감정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최종 목적이 명확했기에, 지금의 고통이나 분노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이 모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작은 분노에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적들을 없애버리려 할 만큼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끓어오르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적, 곧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마지막을 향해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둘리고, 작은 일에도 분노하며,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학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문제집 몇 문제 틀렸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마지막 시험이 있다는 말은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루엔 잠이고, 일생엔 죽음입니다.
이 시험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오늘 감정에 휘둘릴 시간이 없습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