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0,13-16
내가 머무는 곳이 내가 믿는 행복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세 도시를 향해 발하신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희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루카 10,13)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공동체가 곧 나의 심판이 됩니다.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야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두 천사가 롯의 가족을 이끌어내며 “뒤를 돌아보지 말고, 평지에 머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나아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몸은 소돔을 떠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죄악과 허영으로 가득 찬 옛 공동체에 미련을 두었기에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는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 프랜시스가 불행을 한탄하면서도 허영의 삶을 놓지 못해 파멸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작은 등불의 어둠을 좋아하는 벌레가 태양의 빛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작은 사랑의 공동체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큰 사랑의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두 천사가 하느님께 파견되어 롯의 가족을 이끌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파견된 제자들의 공동체를 물리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무느냐가 내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작은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사랑도 점차 증가합니다.
일본 도쿄 시부야 역 앞에는 하치코라는 충견의 동상이 있습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치코는 1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역으로 주인을 마중
나갔습니다.
그 변치 않는 사랑이 하치코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고, 그 사랑이 하치코를 주인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치코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만들어내는지 배웁니다.
이 원리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야생 소녀' 옥사나 말라야입니다.
3살부터 8살까지 개들과 함께 자란 그녀는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동물 치료 시설의 전문가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그녀는 점차 인간 공동체에 속할 수 있었습니다.
옥사나가 먼저 개의 공동체를 떠나 '사람의 공동체'에 머물 수 없었다면, 결코 하느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수준을 점진적으로 높여가야 하는데, 기본적인 인간의 사랑 공동체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을 꾸려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없다면, 즉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외면한다면,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행복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점차 더 큰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종착지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된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끔찍한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콰지모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유일한 공동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탑이었고, 자신을 거둔 프롤로 주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목마른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네주는 작은 사랑을 보여주었을 때, 콰지모도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는 프롤로 주교의 그릇된 욕망보다 더 순수하게 에스메랄다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는 에스메랄다라는 '사랑의 공동체'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추한 외모를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을 통해 우리는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내가 머무는 곳, 내가 선택한 공동체가 바로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지 말해주며, 그것이 곧 나의 심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족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 만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교회 공동체만큼 큰 사랑을
요구하고, 또한 가장 완전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혈연을 넘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르는 사람까지도 이웃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참 행복임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머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봅시다.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그 대답이 우리의 삶을,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한 우리의 길을 결정할 것입니다. 아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