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는 반대가 많았고, 그 반대자로부터 테러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 안에서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어디서 올지 모를 암살자에 대한 두려움에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사방팔방에 거울을 설치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결국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거울이 암살자를 숨지 못하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암살자는 그가 침실에서 자고 있을 때 암살한 것입니다. 깨어 있었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발견하고 막을 수 있었겠지만, 눈 뜨고 잘 수 없기에 거울의 효과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나를 지켜주고, 나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지켜주고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 세상 삶은 채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가 중요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만 집중하게 되면 주님께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행복도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라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하고 이르십니다. 즉시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나병이 나았을 때 행해야 할 절차를 먼저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만 믿은 사람만이 사제에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 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만, 그것도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홉 명은 ‘치유’라는 선물 자체에만 만족하여 서둘러 사제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병이 낫는 것, 즉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관심 있을 뿐, 그 은총을 베풀어주신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세상의 것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면서 영적인 구원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준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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