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42-46
자녀에게 사랑 받으려면 십일조를 가르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일조의 목적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가 그래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헌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자녀에게 봉헌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녀가 행복하게 살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가르친 사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주일 미사에 갈 때마다 헌금하라고 5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왜 내 소중한 동전을 헌금함에 넣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성당을 빠져나와 그 돈으로 오락실에 가곤 했습니다.
그 50원으로 즐기는 게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제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어머니의 50원을 가로채던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 중에 과연 누가 부모님과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봉헌이라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2)
그들은 봉헌이라는 ‘행위’는 철저히 지켰지만, 그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봉헌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참된 목적은 무엇일까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봉헌을 통해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된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원래 주님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일부를 돌려드릴 때, 우리는 돈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됩니다.
돈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와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입고 있던 값비싼 옷까지 모두 벗어 던지며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저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그는 재물을 봉헌함으로써, 돈이 주는 거짓된 안정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오는 참된 자유와 자존감을 얻었습니다.
돈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하지 않는 사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입니다.
둘째, 봉헌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있는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자녀가 평생 부모에게 받기만 하고 단 한 번도 감사의 선물을 드린 적이 없다면, 그 부모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요? 아마 죄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고 다리 밑이나 외딴 산속에서 숨어 사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그들은 부모님께 용서를 청하고 싶지만, 닳아빠진 옷과 빈손으로는 차마 그 사랑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봉헌은 바로 이 부끄러움의 벽을 허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랑의 증표가 되어, 우리를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셋째, 봉헌 곧 나눌 줄 아는 삶은 우리를 이웃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가수 비(정지훈)는 연습생 시절, 스승인 박진영에게 이런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조언을 철칙처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박진영은 갓 데뷔를 앞둔 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무대를 설치하시는 분들, 운전하시는 분들, 후배들에게 잘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지훈 씨는 이 가르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덕분에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과 부를 이웃에게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봉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는 자녀에게 작은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며, 때로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청할까요?
자녀가 ‘내어주는 아픔’을 통해, 자신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부모님의 ‘희생의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느끼는 그 작은 아까움, 그 작은 희생은 우리를 위해 외아들마저 내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그 엄청난 고통과 사랑을 아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하는 창문이 됩니다.
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 이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자녀’의 신앙으로 성장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록펠러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장부를 함께 주며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받은 모든 돈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란다.
그러니 수입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먼저 떼어 하느님께 바치고, 나머지를 사용하거라.”
어린 록펠러는 이 가르침을 평생의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월급 20달러에서 2달러를 떼어
봉헌했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서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입의 십일조를 계산하여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그는 봉헌을 통해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임을 고백했고, 그 믿음 안에서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나눔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록펠러는 누구에게 가장 감사해했겠습니까?
그것을 알려준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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