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47-54
나는 내가 반응하는 사람들의 결과다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게 무슨 나쁜 일일까요?
제가 알던 어떤 분은 아버지를 무척 미워했습니다.
술 마시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렸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어머니를 박해받는 예언자라 믿었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아내에게 그렇게 하여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나는 내가 반응하는 사람의 믿음대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만 닮는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참 신비해서, 사랑이든 증오든, 우리의 감정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대상을
그대로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감정이 반응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반응의 사슬을 끊어낼 유일한 길, 우리 조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혁명적인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들의 어두운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가장 완전한 길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참된 근원,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우리의 유일한 ‘조상’, 즉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신 순간, 인류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상처 준 부모나 나를 억압하는 세상이 내 삶의 기준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나의 유일한 기준이요, 내가 반응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을 보십시오.
19년의 감옥살이 후, 그의 영혼은 자신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에게 온통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자베르의 불신과 세상의 냉혹함이 그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훔친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의 세계는 뒤집힙니다.
“여보시오, 형제여! 이제 당신은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사들인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내가 그것을 악한 생각과 파멸의 정신에서 빼내어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를 통해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처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조상이 자베르에서 아버지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모든 삶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자비에 합당한 아들로 살 수 있을까?’라는 새로운 반응으로 채워졌고, 마침내 성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습니까? 젊은 시절 그는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의 가치관, 즉 명예와 부에 반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야,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만납니다.
육신의 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진 그의 행동은, 옛 조상과의 완전한 단절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라 말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라 자유로이 말할 것입니다!” 그는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에게 반응하기를 멈추고, 완전하신 하늘의 아버지께 온전히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소리에, 어떤 조상의 소리에 우리 삶을 조율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세상의 불완전한 가치관이라는 시끄러운 소음에?
거기에 반응하는 한, 우리 삶은 결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교향곡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일하고 완벽한 기준음, 우리 영혼이 조율해야 할 단 하나의 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서운 대물림을 끊어내시고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땅에서는 아무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마태 23,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은 누구에게 반응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잠 못 들게 하는 그 기억, 그 상처, 그 분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가, 당신의 영혼을 빚어가는 ‘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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