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
실제로 선생님 말씀을 따라 열심히 의자에 앉아서 공부했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성적은 늘 바닥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만 본다면 1등을 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늘 앉아 공부했으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친구는 열심히만 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닐까요?
지금 저는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어떻게 책을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느냐고 묻는데, “하루 종일 게임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아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흥미와 재미를 책에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냥 남의 것을 억지로 따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다지 재미가 없으며 힘들기만 합니다. 나의 재미와 흥미를 찾으면 남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재미와 흥미가 자기 미래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적인 만족은 공허함만 줄 뿐, 기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늘 순간적인 만족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재미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한 남자가 군중 속에서 예수님께 매우 현실적인 문제, 즉 형과의 유산 상속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이런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기에, 완전히 엉뚱한 요청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에게는 ‘탐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세상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재판관이나 중재인이 아니라,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탐욕 안에서는 절대 주님과 함께할 수 없고, 주님의 뜻도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비교하면 이 세상 삶도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위해 탐욕만을 유지한다면, 영원의 시간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면, 땅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둔 성실한 농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독백을 보면 ‘나’, ‘내 것’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이 세상의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명언: 남을 이기는 것이 ‘힘 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기는 것은 진정한 ‘강함’이다(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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