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2,54-59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긴급한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고소인과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너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한 편의 법정 드라마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 마지막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고소인’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고소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고소인이라 하면, 묵시록에 나오는 ‘악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고소인이 악마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소인은 재판관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 하느님이시라면, 고소인 역시 하느님의 편에 선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두신 ‘양심’ 이며,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주신 ‘거룩한 법’ 입니다.
결국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는 이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형 에사우의 군대였지만, 정작 그의 발목을 잡고 머뭇거리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형을 속이고 얻은 이 장자권을 가지고 과연 합당하게 살았는가?’
이 양심의 고소가 야곱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습니다.
그가 이 고소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야뽁 강가에서 정체 모를 존재, 즉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교만, 잔꾀를 상징하는 뼈가 부서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자신을 고소하던 양심의 실체인 형 에사우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앞에서 땅에 일곱 번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형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양심의 고소는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 그것은 우리 영혼을 가두는 가장 끔찍한 감옥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모든 눈길과 대화가 자신을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방은 문자 그대로 감옥이 되고, 그의 삶은 지옥이 됩니다.
결국 그는 이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소하는 양심과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길을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과의 화해는 ‘주님,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교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 저는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는, 그런 나약한 나를 아시면서도 당신 아드님의 피로 나의 죄를 언제나 기꺼이 씻어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탁하며, 눈물로 그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처럼 땅에 일곱 번 엎드려 나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내 이웃 안에서 발견하며,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나 같은 비참한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죄가 클수록 그분의 자비는 더욱 놀랍게 빛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고소인, 즉 율법과 양심과 완전히 화해했다는 최종적인 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용서의 실천’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바 모제스 코르 여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 의사를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과거의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나를 고소하던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풀어주는 마지막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나를 고소하는 자는 율법과 양심입니다.
그리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명확합니다.
첫째, 나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절망하는 대신 나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그 받은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받은 것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자비로운 가죽옷을 입은 사랑받는 자녀로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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