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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신 나자렛을 떠나,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위한 공생활에 접어드신 때부터, 백성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그분을 죽음에 부치려 했으나, 이 지역은 그분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실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장소가 예루살렘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요한 세례자를 참수한 이래 백성을 만나기를 꺼렸던 헤로데, 정확하게 말해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든 이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체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갈릴래아 주민이든 이 지역의 영주이든, 지금은 예수님을 죽음에 부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는 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길, 그러나 결국 당신 사명의 완성인 죽음으로 이끄는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생명을 몸소 내주실 수도,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 곧 하느님 나라 선포는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르러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예언자이신 예수님은 예언자들과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죽음에 부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 완성의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협박은, 영악하고 교활하지만 힘이 없는 여우에 비교됨으로써 무시되기에 이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는 예루살렘의 거부는 이제 정점을 찍기에 이릅니다. 유다 백성은 줄곧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성실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여러 차례 경고와 함께 회개를 촉구했으나, 이 역시 거부로 일관했기에, 하느님은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저버리시고, 끝내 그들을 이방인의 손에 넘기시는 방법으로 징벌을 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예수님도 몸소 너무 늦지 않게 회개하도록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성실하지 못함을 끝까지 자랑했던 이 백성은 마음을 굳게 닫은 채, 그분의 경고와 회개 호소를 경청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와 자비, 한 마디로 하느님의 구원 선물을 마다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당신 말씀에 성실한 사람으로 머물기를, 부족함이 있다면 회개하며 용서를 청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께 모든 것을 내드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나가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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