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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3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0-31 조회수 : 121

루카 14,1-6 
 
법에 너무 집중하면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십니다.
율법 전문가들이 모인, 그야말로 '법'의 심장부입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 '수종'(水腫)을 앓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 법을 어기는가?'
그들의 머릿속은 '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의 도사들이었습니다. 
눈앞에 고통받는 생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데려다가" 병을 고쳐주시고 "보내셨습니다." 법을 '생각'하는 이들은 얼어붙었지만, '사랑'만 생각하시는 분은 행동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강론의 핵심 주제입니다. 
"왜 법에 관심이 많을수록, 오히려 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게 될까요?"  
 
우선 '법'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먹이를 찾아, 모였다 흩어지는 모기 떼에게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약속, 즉 '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사랑으로 나뉩니다. 
나라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회의 법은 그 사회 일치의 중심을 향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정의 법은 어떻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 근간입니다.  
 
하느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사랑'의 정도가 강할수록 더 강력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 공동체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더 행복한 '소속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의 가정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라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수많은 실제적인 방법이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잘 지킬 수 있을까요? 
법을 모르는 네 살배기 아이와, 법전을 통째로 외우는 법관 중에 누가 더 법을 잘 지킬까요? 
운전을 오래 해서 교통법규를 잘 아는 사람이 교통법규를 잘 지킬까요, 아니면 교통법을 잘 모르는 초보자가 더 잘 지킬까요? 
금융 사기범이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니면 죄 안 짓는 철부지 아이가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초보자나 아이가 법을 더 잘 지킵니다. 
전문가들은 법을 '알기 때문에' 신호위반이나
과속을 해도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압니다. 자신들이 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감옥에 가지 않을 만큼 법을 어기는 방법을 압니다. 
혹은 그 법으로 타인을 감옥에 넣기 위해 법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법'을 몰라도 법을 지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법을 지키는 '에너지', 즉 '부모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가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법의 근간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받아야만 채워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법'을 연구했지만, 정작 그 법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사랑을 '에너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는 대신, 법을 '판단할 힘'만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 미제라블’의 경우를 봅시다. 여기, '법'을 '생각'하는 사람의 정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법'을 어긴 죄수였기에, 평생 '법'을 지키는 의인이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법을 알았고, 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장 발장입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사랑'의 에너지가 고갈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리엘 주교를 만납니다. 
주교의 은그릇을 훔쳤음에도, 주교는 그를 '법'으로 고발하지 않고 '사랑'(자비)으로
덮어줍니다. 
"이 사람은 내가 준 것입니다. 
이보게, 내가 준 촛대는 왜 안 가져갔나?" 
 
장 발장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받았습니다'. 
이 에너지가 그의 얼어붙었던 영혼을
녹였습니다. 
자베르는 '법'을 알았기에, 시장이 되어 선행을 베푸는 장 발장을 '법'대로 체포하려 합니다.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범죄자 취급합니다. 
 
반면 장 발장은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줍니다. 
그는 '사랑'을 받지 못해 '법'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코제트'를 만납니다. 
그는 코제트에게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받은 '부모의 사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사랑'(에너지)을 받은 코제트는, '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타인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법을 지키는' 고결한 여인으로 성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장 발장이 자신을 평생 쫓던 자베르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사랑'으로 그를
살려 보내는 장면입니다. 
자베르는 '법'만 알던 자신의 세계가, '사랑'이라는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을'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법'을 어기지 못해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과 사회에 가장 큰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법’을 추종하던 자베르는 파멸했고, ‘사랑’만 생각한 장 발장과 코제트는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법은 그 사회를 만든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받아들여,
그 '부모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할 때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좋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고, 더 나아가 '하늘에 사시던 분'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들은 '법'을 배우느라, 그 법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법이 지켜지라고 주신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하늘의 법을 지키는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배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너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랑에 '순종'(응답)함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미사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미사는 '사랑'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나는 수많은 법을 다 외우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할 때 그 가정에서 지켜져야 하는 법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수많은 법을 공부하기보다는 그 모든 법을 잘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가면 됩니다. 
법의 정신은 사랑이기에, 법을 지키게 만드는 힘은 법을 아는 것이 아닌 사랑을 받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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