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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일 _ 김건태 루카 신부

작성자 : 김건태 작성일 : 2025-11-01 조회수 : 68

위령의 날: 등잔과 기름

 

 

흩날리는 낙엽 소리에도 감정이 풍부해지는 계절, 한복판에 들어서 있습니다. 고운 빛깔, 아름다운 색깔을 띠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어떤 생각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때, 때가 되어 떨어지는 것들이 아름답다는,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고, 생명이 소중한 것은 언젠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이 자연을 잘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셨다지만, 실은 자연을 통해 배우라고, 많이 본받으라고 맡겨주셨다는 생각입니다. 한 해를 잘 산 나뭇잎들은 제때가 되면 잘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죽어서 떨어진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낙엽은 살아서 떨어집니다. 물기를 머금지 못하면, 곧 살아 있지 않으면, 절대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 낙엽입니다. 떨어지지 못하면 이미 그것은 낙엽이 아닙니다. 겨우 내내 말라비틀어진 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사귀의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목격하는 이유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고, 또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자연의 섭리와 가르침 앞에 마음을 조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잘 사는 방법, 그러니까 잘 죽는 법을 열 처녀 비유이야기를 통해 일러주십니다. 신랑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것이 문제이긴 하나,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열 명의 처녀 모두에게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곧 등잔이 주어져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할 자격은,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할 자격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흘러넘치도록 기름을 가지고 있다 해도, 등잔이 없으면 신랑을 맞이할 수도,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름 마련에 앞서 이 등잔 자체, 이 등잔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잔칫상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등잔까지 적당한 것으로, 각자에게 알맞은 것으로 쥐여주십니다. 그리고서는 당신 하시는 일에 우리 인간이 끼어들 수 있도록, 죄송한 마음 또는 감사의 마음으로 무언가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저 기름만 조금 준비하면 된다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따라서 기름 마련은 잔칫상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자격은, 다시 말해서 등잔은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거저 주어진 이 선물, 더 들어가 보면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이 선물 앞에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감사의 마음과, 이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기름 마련은 그러기에 구원 선물 앞에 우리가 드러내 보여야 할 감사의 표현, 감사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그 기름 마련은 기도, 그리고 사랑 실천 등으로 가능하다 말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없다면, 그 역시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늘귀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눈 깜빡할 사이에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당신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선물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큼은 참으로 많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봉사와 희생으로 사랑 실천에 앞장설 수 있고 등등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도 더 하게 됩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사랑 실천에 임하면,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와 지혜가 나오는지 기적 같은 일까지 해내고야 맙니다. 어림도 없었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한데, 고마운데, 어찌 머리를 굴리고, 어찌 주위를 살피고, 어찌 이 정도면 됐다하는 어림도 없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한 주간,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꼭 맞는 것으로 나누어주신 등잔을 받잡고서, 감사의 마음으로 기름 마련을 위해 애쓰며, 좀 더 여유 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형제들과 함께 지상에서 이미 하늘나라 잔칫상을 그리고 맛보셨으면 합니다.

나아가, 앞서가신 분들이 기름 마련에 부족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당신의 그 크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그분들 모두 영원한 천상 잔칫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청하는 기도 아끼지 않는 거룩한 한 달, 위령성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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